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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이난영 수필가
설레는 마음으로 정문에 들어섰다.우뚝 선 전망대가 눈에 들어오며, 가을을 물들인 담쟁이와 바람의 자전거가 맞이한다.
꿈 많은 여고 시절, 시골에서 흔히 보고 듣던 국화꽃, 소쩍새, 천둥, 먹구름, 내 누님, 무서리 등 일상적인 언어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정신적 성숙을 표현한 시 '국화 옆에서'는 희망의 메시지 같았다.
몇십 년 가슴에 품은 시인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는 미당시문학관 탐방은 고창읍성, 신재효 고택, 판소리 박물관, 선운사를 관람할 때와는 전혀 다른 떨림으로 다가왔다.
미당 서정주의 삶과 문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미당시문학관은 시인의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는 폐교를 리모델링해 2001년 가을 개관했다.
기존건물 사이에 좁고 높다란 5층 건물을 새로 올린 전망대는 큰길에서도 한눈에 보인다.
담쟁이덩굴이 콘크리트 벽을 뒤덮고 있어 기존건물처럼 전통 있는 학교의 옛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운치를 더해준다.
안으로 들어가니 전시실, 세미나실, 서재 재현실, 전망대 등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
2013년 대대적인 보수로 새롭게 단장하였다고 하더니 매우 정갈했다.
시와 사진 등이 있는 첫 전시실을 돌아보고, 세미나실에서 바람의 시인을 영상으로 만났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소개한 시인의 삶과 인간적인 모습에 감탄하며, 학예연구사의 각 실, 복도, 계단에 진열되어있는 작품 해설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 기울였다.
미당의 서울 자택 서재를 재현한 서재 재현실에는 운보가 그린 미당 초상화, 박노수 화백의 시화, 거문고, 친필이 들어 있는 도자기 등이 있어 미당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전시실마다 육필원고와 작품집, 선생이 생전에 쓰시던 지갑, 수첩, 모자, 여권, 시계에 담뱃대까지 미당의 소장품 5천여 점이 전시되어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으로 추앙받던 미당의 인간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미당의 생애를 엿 볼 수 있는 전시물들을 보며 경이로움과 기쁨으로 가슴 벅차올랐다.
미당 선생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벽(壁)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해 끊임없는 모색과 변모와 성취로 15권의 시집을 내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다작의 위업을 남겼다.
유종호 문학평론가는 미당은 무잡한 다산성(多産性)이 아니라 정치(精緻)하고 세련된 다산성으로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한국에서는 '단군 이래 최대의 시인'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1천여 편의 시를 남겼다고 하며, 부족 방언(部族 方言)의 순화와 세련에 기여한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했다.
전시된 물품을 톺아보며 오르다 보니 옥상 전망대이다.
마을 앞에는 넓은 들판과 함께 서해와 변산반도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마을 뒤에는 소요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수려한 산세가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다.
아름다운 자연풍광은 아무 말이나 붙들고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된다는 천재 시인의 창작 샘물이 되지 않았나 싶다.
미당시문학관에는 선생의 친일문학 활동이나 모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는 축시까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미당의 행적에 이런저런 비판도 없지 않지만, 20세기 우리나라와 같이 척박하고 파란 많은 사회에서 한길로 정진해 전례 없는 성취를 보여준 재능은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여고 시절, 시 낭송을 멋지게 하는 국어 선생님 눈에 들기 위해 주옥같은 시를 참 많이 외웠었다.
고독과 향수가 아롱진 소박 하고 부드러운 노천명의 시나 아름다운 시어의 소월 시가 마음을 사로잡았으나 미당의 '국화 옆에서'를 가장 애송했다.
어렵게 고등학교 입학을 하였지만, 가난으로 졸업은 불투명한 상황에서 젊음의 온갖 시련을 거쳐 지니게 된 성숙한 삶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 '국화 옆에서'는 알게 모르게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시문학관 표지석 앞에서 '국화 옆에서'를 외워본다.
여고 시절이 떠오르고 고향 집 가을 뜨락이 그려진다.
집안을 환하게 밝혀주던 해바라기와 노오란 국화꽃이 고운 미소를 보낸다.
불타는 학구열에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시험을 보는 딸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빛도 아른거린다.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대학교를 40이 넘어 진학하는 딸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어머니! 지금은 볼 수 없어 애석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인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라고 했다.
수필 산에 발을 들여놓은 지 꽤 오래됐으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밑에서만 빙빙 돌고 있었다.
두 권의 수필집을 내었다고는 하나 독자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미당이 잠자는 뇌를 깨운 듯 활연개량(豁然開朗)이란 말이 떠오른다.
미당이 시골소녀에게 희망을 주었듯 정치하고 세련되지는 못해도 울림과 떨림 있는 글로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이난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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