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공원(위키미디어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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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공원(©종로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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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동과 혜화동로터리 사이에 위치한 동숭동은 서울대학교 의대병원과 아르코대극장, 마로니에공원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옛날에는 이 지역 낙산 기슭에 잣나무를 많이 길러 ‘백동栢洞’, 즉 ‘잣골’이라 불렀다. 이후 일본에 의한 국권 피탈 이후 경성부에서 동명을 지을 때 숭교방 동쪽에 있다 하여 동숭동이 되었다. 이후 쌍계동과 동숭동 지역으로 존재했는데 지금은 행정동인 이화동에 속해 있다. 동숭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서울대학교다. 동숭동에서 서울대학교병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로마네스크풍 건물이 하나 있다. 이 건물은 지금 ‘예술의 집’이라 부르지만 사적 제278호인 구 서울대학교 본관 건물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당시 민족 지도자들은 민립 대학 건립을 시도했다.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여 자금을 모으고 계획을 세웠지만 일제는 이를 방해하기 위해 1922년 ‘조선 교육령’을 발효하고 1924년 5월2일 경성제국대학을 세웠다. 관립이었다. 당시 일제는 자신들의 식민지에 총 일곱 개의 제국 대학을 세웠는데 경성제국대학이 그 여섯 번째 학교였다. 법문학부와 의학부로 시작한 경성제국대학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동숭동=대학 문화’의 시작인 셈이다. 해방 후 경성제국대학은 서울대학교가 되어 한국 최고의 명문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동숭동은 대학 문화 대신 ‘젊음의 거리’ 혹은 청년 문화가 확장된 ‘연극과 문화의 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가 떠난 자리에는 공원이 들어섰다. 그 이름은 마로니에공원이다. 공원의 유래는 단순하다. 서울대학교가 이전하면서 대학 본부를 제외한 모든 건물은 철거되었다. 그리고 공원을 지었는데, 당시 빈 캠퍼스에 누가 심었는지 모르는 마로니에 나무가 세 그루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별 스토리 없는 작명이지만 나름 ‘낭만적’이다. 마로니에공원은 소극장, 청년 문화와 어울리며 다양한 사람들의 개성 있는 공연이 끊이지 않는 열린 공간으로 그 가치를 존중받고 있다. 동숭동의 진짜 보물은 낙산駱山이다. 산의 모습이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았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으로 불렀다. 또 이곳에는 조선 시대 왕실에 우유를 진상하던 목장이 있어 ‘타락산’이라고 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낙산은 사실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으로, 우백호인 인왕산과 함께 서울과 궁을 수호하는 중요한 포인트였다. 특히 빼어난 경치로 삼청, 인왕, 쌍계, 백운, 청학의 한양 도성 5대 명소에 손꼽힌 쌍계가 바로 낙산 일대다. 지금은 공원화되어 동대문에서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터, 이화동 벽화마을, 낙산공원, 마로니에공원을 거쳐 동숭동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걷기 좋은 길’ 중 하나가 되었다.
서울대학교가 있던 시절 서울대생들은 학교 앞 개천을 ‘세느강’, 그 위의 다리를 ‘미라보다리’라 불렀다고 한다. 우연하게도 파리의 샹제리제 거리의 가로수 역시 마로니에라고 한다. 사람은 가도 그 흔적은 노래로, 시로 그리고 문학으로, 때로는 나무 한 그루로라도 남는가 보다.
[글 장진혁 사진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위키미디어, 종로구청]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05호 (19.10.26)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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