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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월)

영화 ‘헤로니모’ 카스트로가 사랑한 혁명가, 헤로니모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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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쿠바로 여행을 떠난 전후석 감독은 공항 픽업 택시에서 한인 4세 쿠바인을 만나고, 그녀의 가족 모임에 초대받는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아바나 법대를 다니고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의 중심에 섰으며, 이후엔 정보국 요원으로 활약한 그녀의 아버지 ‘헤로니모 임(임은조, 1926~2006)’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헤로니모의 아버지 임천택의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를 많은 이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한다.

시티라이프

“묵서가(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다. 부자가 많고 가난한 이가 적으니, 젊은 한인들이여, 어서 오라.” 멕시코와 국교도 없던 1905년, 신문 광고에 속은 1033명의 한인들이 부푼 꿈을 안고 제물포에서 멕시코행 배에 오른다. 그들 중에는 만 2세의 나이로 어머니 품에 안겨 조국을 떠난 ‘헤로니모 임(임은조)’의 아버지 임천택도 있었다. 멕시코의 에네켄(애니깽) 농장에서 힘든 생활을 했던 임천택은 힘든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한인들과 매 끼니 쌀 한 숟가락씩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독립 자금을 보낸다. 1910년 국권 피탈로 돌아갈 곳을 잃고 쿠바로 이주한 임천택은 아들 헤로니모 임을 그 땅에서 키워낸다. 헤로니모 임은 남미 한인 최초 대학생이자 아바나 법대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동기가 된다. 흩어진 사람들, 고국을 떠나는 사람, 집단의 이동을 뜻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 쿠바 한인사는 그중 가장 알려지지 않은 디아스포라다.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와 어깨를 나란히 한 쿠바 혁명의 주역이 된 헤로니모는 혁명 성공 후 쿠바 정부에서 산업부 차관을 역임하며 아홉 개의 훈장을 수여했으며, 쿠바 한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그는 젊어서는 자신의 조국이라 할 수 있는 쿠바의 혁명을 위해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은퇴 후에는 쿠바 한인 사회 재건을 위해 헌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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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헤로니모’는 조국의 땅을 밟아 본 적 없는 그들이 100년 넘게 이어 온 꼬레아노의 정신과 함께,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와 함께 도시 비밀 조직을 이끌며 쿠바 혁명의 주역으로 떠오른 헤로니모의 일대기를 다룬다. 영화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편집이 흥미로워 다큐멘터리가 주는 중압감을 덜어 낸다.

여기엔 삽입된 음악의 영향이 크다. 헤로니모가 1995년 쿠바 한인 대표로 처음 한국 땅을 밟는 장면에서 흘러나온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 이소은이 새로 부른 ‘고향의 봄’, 한인 정체성을 이어 가는 쿠바 이민자들이 함께 부른 노사연의 ‘만남’은 그 자체로 감동이다. 경찰청 요원과 산업부 차장 등 쿠바 내 한인 가운데서는 정치적으로 가장 높이 올라갔던 인물,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가까이 두고 신임했던 혁명가, 프랑스와 독일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했던 정부국 요원. 이런 과거도 흥미롭지만, 정작 조국은 그를 기억하지 못함에도 독립 운동 자금까지 보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쿠바 한인회를 꾸리고 한글 학교를 세우는 행보도 눈물겹다. 1995년, 헤로니모가 한국을 방문하는 시점 이후 목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며 뭉클함이 지속된다. 극장을 나서며 한 청년의 쿠바 여행이 아니었으면 기억하지 못했을, ‘심장이 큰 사람’ 헤로니모를 모두들 기억하게 될 것이다. 러닝 타임 93분, 11월21일 개봉.

[글 최재민 사진 커넥트픽쳐스]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05호 (19.10.26)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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