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탬프 찍으며 떠나는 시간여행
'안과 밖' 경계·연결의 상징 한양도성
흥인지문~혜화문 잇는 성벽
태조·세종·순조 시대 흔적이 켜켜이
서울 종로구 흥인지문 전경.(사진=서울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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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양지윤 기자] 지난 15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종로구 흥인지문.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6번 출구를 빠져나가 흥인지문 앞에 섰다. 주변 차도에선 무심한 듯 쌩쌩 차가 달린다. 흥인지문으로 점점 다가가자 회전 그네에 앉은 것마냥 주변이 빙글빙글 돈다. 앵글이 멈추자 흥인지문은 거대한 블랙홀로 바뀐다. 600년 전 한양도성으로 향하는 타임슬립(시간 이동)은 놀랍게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서울 도심 한복판서 한양도성 600년을 느끼다
“여러분, 돌 크기가 다른 게 보이나요? 잔돌은 헌돌, 큰돌은 새돌이에요.” 600년 전 그 시절로 시간여행을 안내하고 있는 이용욱(76세·남) 한양도성 해설사가 흥인지문을 둘러싼 옹성을 가리키며 돌의 크기가 다른 이유를 설명했다. 유심히 살펴보니 옥수수알처럼 몽글한 돌과 깍두기처럼 반듯한 네모 모양의 커다란 돌들의 경계가 보인다. 옥수수알 모양의 잔돌은 15세기 세종대왕, 깍두기 모양의 큰돌은 19세기 순조 시대 흔적이다. 돌이 큼지막해진 것은 18세기 최고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거중기를 고안해낸 뒤 찾아온 변화다.
“서울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서 군사적으로 흥인지문이 가장 취약했어요. 흥인지문 바깥쪽으로 옹성을 하나 더 쌓아 정찰 중인 군인들의 머리가 보이지 않게끔 했어요.” 해설사의 설명 덕에 흥인지문에 두겹의 옹성이 야무지게 쌓여 있는 데 대한 궁금증이 비로소 풀렸다.
무악동 성벽 전경. 멀리 남산이 보인다.(사진=서울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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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 도심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에서 방어할 목적으로 축조한 성이다. 1396년 태조 5년 백악(북악산)·타락(낙산)·목멱(남산)·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뒤 수차례 개축과 보수를 진행했다. 한양도성의 평균 높이는 약 5~8m, 전체 길이는 약 18.6km에 달한다. 현존하는 전 세계 도성 중 가장 오랜 시간 도성 기능을 수행했다. 1396년부터 1910년까지 무려 514년동안 한양의 울타리 역할을 한 셈이다.
한양도성의 첫 완공 시기는 약 620년 전이다. 태조 5년 음력 1월9일부터 2월28일까지 49일, 이어 8월6일부터 9월24일까지 49일 등 총 98일동안 전국 백성 19만7400여명을 동원했다. 전체 공사구간 총 5만9500척을 600척씩 97구간으로 구분하고 각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이름을 붙여 군현별로 일감을 나눠줬다. 태조 때 처음 축성할 당시 평지는 토성(土城)으로 산지는 석성(石城)으로 쌓았다. 세종 때 개축 과정에서 흙으로 쌓은 구간도 돌로 바꿨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성벽 일부가 무너져 내리면서 숙종 때 대대적인 보수와 개축을 한데 이어 이후에도 수차례 정비가 이뤄졌다. 특히 일부 성돌에는 공사 관련 기록들을 세기기도 했다. 태조·세종 때는 구간명과 담당 군형명을 기록했고, 숙종 이후부터 감독관과 책임기술자, 날짜 등을 써 책임 소재를 분명히 가릴 수 있게 했다. 해설사를 따라 흥인지문에서 낙산구간 초입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이르자 책임자의 이름을 새긴 각자성석이 보인다.
◇경계와 연결의 상징 한양도성
한양도성박물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거진 갈대숲 사이로 낙산구간 성벽이 수줍게 자태를 드러낸다. 한양도성박물관 앞은 한양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사진찍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특히 가을 풍경 뿐만 아니라 야경도 수려해 신혼부부나 연인들이 스냅 촬영 지역으로 선호하는 지역이라고 한다.
600년 전 민초들에게 한양도성은 거대한 벽이었다. 서울과 지방을 구분하는 동시에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왕과 백성의 삶이 이승에선 ‘하늘과 땅’ 차이를 보였다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신분 구분없이 모두 평등했다. 생을 마감하면 반드시 도성 밖에 묻혀야 했기에, 한양 사는 사람들에게 도성은 삶의 증표와 같았을 터. 한양도성은 서울과 지방을 나누는 경계선이기도 했으나 둘을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 역할도 했다. 도성 안에서는 채석을 금지했던 탓에 성을 쌓는 데 필요한 돌은 모두 성 밖에서 가져와야 했다. 한양도성은 내사산(內四山)과 외사산(外四山)을 연결하는 동시에 도성 안과 성저십리(성 밖 십리)를 통합하는 구심점이었던 셈이다.
성벽을 따라 낙산 정상을 향해 걸었다. 124m의 낙산은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낮다. 타락산으로 불리우던 낙산은 조선 시대 우유 조달관청인 ‘타락색’이 위치하고 있어 독특한 이름이 붙었다. 산 모양이 낙타의 등 모양처럼 생겨 낙타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완만한 경사 덕일까. 산을 오르기보다 가벼운 산책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흥인지문과 마찬가지로 성벽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돌들이 채워져 있다. 태조 때의 돌들은 자연석을 다음어 다소 투박해 보였다면 세종 때의 돌은 옥수수알처럼 옹기종기 모여있다. 무너진 구간을 새로 쌓았던 숙종 때는 40~45cm 크기의 돌들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순조 시절 돌은 숙종 때보다 20cm 정도 크기가 클 뿐만 아니라 정방향으로 다듬어 정교한 느낌마저 들었다.
가을 단풍이 진 낙산의 모습.(사진=서울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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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에서 보물을 찾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성벽의 돌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하고 성벽 너머로 뻥 뚫린 하늘을 감상하기도 했다. 어느새 도착한 곳은 성벽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화마을. 지은 지 오래된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골목도 비좁아 한때 낙후지역으로 꼽히던 마을이다. 하지만 미운 오리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지난 2006년부터 정부 지원으로 예술가들이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리고 빈 터에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마을 이미지가 밝고 화사하게 바뀌었다. 이용욱 해설사는 “이화마을 주택을 적산가옥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며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지어진 집들로, 일제의 잔재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겨울 바람에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이화마을에 있는 찻집을 찾았다. 따뜻한 차를 들고 야외 테라스로 나가자 시야가 넓어진다. 왼쪽에는 동대문 패션타운의 배후지이자 소규모 봉제공장이 옹기종기 자리 잡은 창신동이 보인다. 오른쪽 시야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부푼 창경궁이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한양도성을 두번째 방문한다는 직장인 장하니(27·여)씨는 “동대문하면 역사적인 공간보다 약속이나 쇼핑 장소로만 여겼다”며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찬찬히 둘러보니 이전과 달리 새로움이 느껴진다”고 소감을 전했다.
잠시 목을 축인 뒤 다시 낙산 정상을 향했다. 10여 분쯤 걸었을까. 성벽 너머 보이던 집들이 점점 사라지더니 정상에 이르자 탁트인 하늘이 펼쳐졌다. 낙산공원은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망 좋은 곳이다. 특히 이 곳에서 바라보는 노을과 야경은 진수로 꼽힌다. “여러분, TV 일기예보 자주 보시나요? 야외에서 날씨를 전할 때 배경으로 나왔던 성벽 기억하시나요? 여기가 바로 그 단골 촬영지에요.”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에서 마치 보물을 찾은 기분이 든다. 그동안 잘 몰랐던 서울 그리고 한양. 600년 전부터 우직하게 우리들을 품어주고 있는 한양도성을 거닐며 다음 시간여행을 기약한다.
인왕산 남쪽 성명의 모습.(사진=서울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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