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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영국판 '국민과 대화'… 쏟아진 송곳 질문, 총리는 진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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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코빈, 총선 앞두고 TV토론… 국민 12명이 질문자로 나서

"선심성 공약은 던져버려라" "당신이 이 나라 통합시킬수 있나" 총리 찬양·읍소는 1건도 없어

다음 달 12일 총선을 앞둔 영국에서 보수당을 이끄는 보리스 존슨 총리와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이 19일(현지 시각) TV토론으로 맞붙었다. '국민과의 대화' 형식으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 질문자로 나온 영국 국민은 존슨 총리와 코빈 대표를 향해 송곳 같은 질문들을 쏟아냈다. 현장의 방청객들은 답변이 시원찮을 땐 노골적으로 야유를 보내며 조롱했다. 국정의 최고책임자와 그 파트너를 상대로 찬양과 읍소형 질문은 한 건도 없었다. 이 토론회를 전한 외신들은 토론자로 나온 두 사람보다 날 선 질문을 쏟아낸 질문자와 이를 적절히 유도한 관록 있는 사회자에 찬사를 보냈다.

이번 토론은 영국의 3대 지상파인 아이티비(ITV)가 주관했다. ITV는 영국 전역에서 질문을 받고 이 중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한 12명의 국민을 스튜디오로 초대했다. 이들이 직접 자신의 질문을 던지고 존슨과 코빈이 각각 대답하는 '국민과의 대화' 형식이었다.

토론 시간은 50분에 불과했지만 브렉시트, 의료제도, 정치체제 등 영국 사회 전반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질문이 쏟아졌다. 첫 번째 질문은 중년 여성 캐스 셜록이 던졌다. 그녀는 "우리가 브렉시트를 가지고 영원히 얘기하지 않아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의회가 3년이 넘도록 브렉시트 해법을 찾지 못해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트린 것을 힐난하는 질문이었다.

존슨은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서 "우리(보수당)는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자 사회자는 "동전을 만들 충분한 시간이 있다는 말이냐?"고 비꼬았다. 영국 정부가 지난 10월 31일로 예정됐던 브렉시트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주화 수백만개를 찍어냈다가, 브렉시트가 연기되자 부랴부랴 주화 생산을 중단한 실책을 꼬집은 것이다. 청중석에선 폭소와 박수가 터졌다.

옆에서 미소 짓던 코빈도 '한 방' 먹었다. 존슨은 "코빈은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다시 하자고 주장하는데, 정작 그 자신은 탈퇴인지 잔류인지도 밝히고 있지 않다"고 공격했다. 노동당은 총선에서 표가 갈릴 것을 우려해 브렉시트 지지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코빈이 당황하며 의료제도 문제로 말을 돌리려 하자 사회자는 "이건 토론이다. 답을 하셔야 한다"고 코빈을 압박했다. 코빈이 "내 입장은 분명하다"라고 말을 시작해놓고 또다시 원론적인 이야기로 말을 돌리자 청중석에서는 폭소와 박수가 터졌다. 도망치는 코빈을 조롱한 것이다. 코빈은 존슨과 사회자에게 브렉시트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는 질문을 8차례 받았으나, 모두 회피했다.

영국 정치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남성 질문자는 다리를 꼬고서 "당신들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느냐"고 말을 시작했다. 그러자 방청객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졌다. 이어 그는 "형편없는 수준의 거짓말로 우리 사회의 토론은 유독(Toxic)해졌다"면서 "당신들이 이 나라를 하나로 모을 수 있으리라고 어떻게 기대하겠느냐"고 일갈했다.

존슨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라면서도 당황한 듯 말을 수차례 더듬었다. 그때 사회자가 돌연 존슨에게 "이번 선거에서 진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존슨이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답하자, 청중석에서는 "오 진실!(Oh Truth!)"이라며 비아냥이 터져 나왔다. 더 타임스 기자 시절 '조작 기사'로 해고까지 당한 존슨에 대한 경멸의 표현이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에 대한 비판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의사라고 밝힌 한 남성은 "(병원 부족으로) 노인 환자들이 복도에 틀어박혀 긴 줄을 서야 한다"면서 "단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보다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하다"고 질문했다. 또 다른 여성은 "최저임금을 받는 가정부"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당신들은 돈이 많아 걱정이 없겠지만, 나는 긴축 정책이 걱정"이라며 "바보 같은 선거의 선심성 공약은 던져버리고,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나"라고 물었다.

외신들은 두 후보자의 답변은 원론적이거나, 새로운 게 없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오히려 이날 가감 없이 비판을 던진 질문자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워싱턴포스트는 "두 후보에게 공개적인 불신, 혐오감이 담긴 날카로운 질문들이 쏟아졌다"면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청중이었다"고 분석했다. 인디펜던트는 "토론의 승자는 두 후보를 믿지 않은 청중이었다"고 평가했다.

[원우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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