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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피부과 찬밥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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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상처로 찾아간 피부과 "보험 환자는 예약 안 받아요"

다른 병원 "현금 20% 할인"… 미용주사 환자들 바글바글

의사라는 직업인, 양심·위엄·명예 선서한 사람 아닌가

조선일보

한현우 논설위원


발에 난 상처를 치료하러 집 근처 피부과에 갔다. 한참 기다려 진료받고 다음번 예약을 하려 하니 접수 직원은 예약은 안 되고 그냥 아무 때나 오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예약했다며 접수하거나 다음 예약을 하고 돌아갔다. 직원은 "보험 환자는 예약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돈 되는 환자만 예약받는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그렇게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따지려다가 그만뒀다. 세태가 그럴뿐더러 직원에게 그걸 따진다 한들 '진상' 소리나 들을 것이었다. 병원 수납 직원은 작은 약 상자 두 개를 주면서 "이 약들은 화장품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1만5000원을 받았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소독약과 거즈였다. 의사들이 정말 예전 같지 않은가 보다 하는 생각보다 이렇게까지 장사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뒤 다시 갔더니 돈 되는 환자들이 전보다 더 많았다. 30분 넘게 기다려 처치실에 들어가니 간호사가 반창고를 떼고 소독을 한 뒤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상처가 복숭아뼈 근처에 있어 서양 누드명화 속 모델처럼 침상 위에 비스듬히 앉아 기다리는데 20분이 지나도 의사는 오지 않았다. 간호사가 몇 번 와서 "환자가 너무 많아 오래 걸린다"고 했다. 마침내 의사가 와서 상처를 보더니 "잘 아물고 있네. 사흘 뒤에 또 오세요" 하고는 간호사에게 "자, 저번처럼"이라 말하고 나갔다. 말 그대로 5초 만에 진료가 끝났다. 별 상처가 아니어서 그렇겠지 하는 생각보다 빨리 돈 벌러 가야 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호사는 지난번처럼 드레싱을 하고 주사를 놔주었다. 진료비를 내니 영수증과 처방전을 주기에 버려달라고 했다. 직원이 영수증을 버리고 처방전을 주려고 했다. "아니, 둘 다 버려주세요"라고 말한 뒤 병원을 나왔다. 의사가 잘 아물고 있다고 했으므로 다시는 그 병원에 가지 않았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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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 다른 피부과에 갔다. 중국어로 대화하는 젊은 여성 네댓 명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접수대에서 "발에 난 상처 때문에 왔다"고 하니 직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진료실 문을 빼꼼 열더니 "보험 환자가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발에 상처가 났다는데요" 어쩌고 하며 '병원에 왜 환자가 왔을까'를 주제로 짧은 대화를 했다. 진료실 안에 있던 사람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앞서 온 중국인 환자들을 먼저 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괜찮겠냐고 직원은 말했다. 기다리겠다고 했더니 그의 얼굴이 더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그제야 병원 안 풍경이 조금씩 보였다. 여러 가지 주사 종류와 가격표가 메뉴판처럼 벽에 붙어 있었다. 그 메뉴판 테두리는 네온사인으로 장식돼 있었다. 그 외에도 접수대 주변에 온갖 주사와 시술의 명칭과 가격이 쓰여 있는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자기들끼리 뭔가 열심히 상의하던 중국인들이 각자 맞을 주사를 결정한 모양이었다. 직원이 계산기를 들고 그들에게 다가가 설명했다. "무슨 주사가 20만원인데 현금은 20프로 디스카운트해서 16만원" 하는 식이었다. 재래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각자 가방에서 5만원짜리 다발을 꺼내 1인당 수십만원씩 현금으로 결제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병원을 나왔고 직원은 나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날부터 꾸준히 집에서 1만5000원짜리 거즈와 소독약으로 치료한 결과, 피부과에 가지 않고도 상처는 아물었다.

의사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는 킬킬거리며 듣다가 결국 의사 편을 들곤 한다. 요즘 의사가 옛날 같은 줄 아느냐, 나도 피부과 주사 놔줘야 먹고산다, 출산율 떨어지는데 산부인과 의사들은 또 어떻겠냐…. 그런 말들로 이어지다가 "그래서 문재인 케어가 문제"로 끝맺는다. 맞는 말이지만 지겹다. 나는 제도와 시스템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의사라는 직업인에 대해 얘기한 것이다.

의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존경받을 만하고 또 존경받아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존경받으며 돈을 벌 순 있다. 돈 벌려고 존경을 포기한다면 선생님이란 호칭도 포기해야 한다. 의사는 현금가 20% 할인을 외치지 않는다. 환자에게 화장품 팔지 않는다. 의사는 "나는 양심과 위엄과 명예를 받들어 의술을 베풀겠노라"고 선서한 사람이다.

[한현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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