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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이슈 미술의 세계

"지금도 그림 그릴 때가 가장 즐겁지", 원로작가 윤석남 작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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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윤석남 작가의 ‘신가족’(2019), 혼합 매체·가변 크기. OCI미술관 전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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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작업실에 가면, 그림을 그리면,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기쁨을 느낀답니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리는 윤석남 작가(80)의 말이다. 이 원로작가는 “우연히 들른 한 장소가 지닌 매력에 빠지면 아직도 곧바로 설치작업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충동을 버릴 수 없다”고 덧붙인다.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살다가 나이 마흔에 미술가가 되겠다고 홀로 그림 공부를 하고, 유학까지 떠났던 작가의 열정이 여전히 뜨겁다.

윤 작가가 식지 않는 예술혼을 담은 작품전을 열고 있다. ‘벗들의 초상을 그리다’란 이름으로 OCI미술관(서울 우정국로) 전관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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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의 ‘벗들의 초상을 그리다’에서 선보이고 있는 인물채색화들. OCI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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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들을 그린 초상화 20여점, 자화상 50여점, 설치작품, 채색화 등으로 3개 층의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활달한 표정과 몸짓으로 힘이 넘쳤다. “이번 전시는 여러 해 동안 매달리고 있는 초상화, 채색화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한국화인지 민화인지 장르로 구분하기 힘든 작품들인데, 즐겁게 애쓴 작품들이거든요. 초상화는 앞으로도 계속해야지 할 정도로 매력이 있어요.”

친구들의 초상화는 모두 22점이다. 좋은 한지를 골라 민화에 주로 쓰는 채색안료와 먹을 모필로 그렸다. 화면 속 주인공들은 다양한 연령대의 화가·시인·음악가·미술사가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다. “그야말로 고마운 벗, 친구들입니다. 제가 그림을 하면서 만나고 여러모로 도움을 받은 분들이죠.” “남자는 한 명도 없다”는 물음에 “사실 그릴 만큼의 남성과의 교류는 크게 없었다”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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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 작가의 ‘자화상’(2018), 한지에 채색, 93×70㎝. OCI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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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작가가 초상화에 빠져든 것은 ‘공재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에서 비롯됐다. “약 10여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재 자화상을 만났는 데 큰 충격을 받았죠. 형형한 눈빛, 긴 수염…. 살아서 나에게 무슨 말인가를 전하고 있는 듯한 그 눈빛에 너무 놀랐습니다. 당장 붓을 들고 먹을 갈고 초상화를 그려야지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후 작가는 한국화를 배우고 공부하면서 초상화, 민화에 몰두했다. 특히 조선시대 여성 초상화가 거의 없다는 점도 작용했다. 그래서 당당하게 삶을 가꾸고 있는 여성들을 화면에 담기로 다짐했다. 초상화 작업은 쉽지 않다. 한 사람의 역사와 삶을 담아내야 진실한 초상화여서다. 작가는 “꽤나 많은 공을 들인다”고 말한다.

자화상도 50여점에 이른다. 지난 해 전시회에서 첫 선을 보인 자화상에 신작을 더했다. 그동안 자신의 어머니, 어머니로 상징되는 여성들을 통해 발언해온 작가가 자신의 삶을, 내면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드러낸 결과물이다. 한지에 먹을 주로 쓴 자화상은 눈빛이 두드러진다. 관람객과 눈맞춤이라도 하듯 정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작가의 자의식, 의지를 드러낸다. “원래는 저를 초상화 모델로 시작했는데, 자화상을 하면서 많은 걸 느꼈죠. 제 자신을 성찰하게 되더라구요.” 작가는 민화 재료나 기법을 쓰면서도 구도나 색감, 세세한 표현에 있어 ‘윤석남 식 채색화’를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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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 작가의 ‘괜찮아 걱정마 잘할거야’(2019), 한지에 채색, 135×28㎝. OCI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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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화, 자화상에서 작가의 개인적·인간적 면모가 보인다면 설치작품에선 여성주의적, 현실 사회와 소통하는 작가의 작품세계가 드러난다. 전시장 들머리의 ‘신가족’은 반려견을 표현한 목조각과 인물채색화로 전통적 가정상이 아니라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새로운 가족 형태를 보여준다. 나무 작업인 ’소리’는 광화문 광장에서의 촛불집회가 소재다. 살짝 가려진 촛불과 저마다의 인물들이 어우러져 광장의 외침을 떠오르게 한다. 작가가 오랫동안 작업해온 ‘허난설헌’은 한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낸 여성의 외로움, 고아함을 표현하고 있다.

윤 작가는 “앞으로 한 1년간은 붓을 놓고 공부를 해야할 것같다”며 “책도 마련하고 공부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역사적 의미도 있고, 이 시대에 무언가 이야기를 전하는 역사 속 여성들의 초상화를 본격적으로 하고 싶어요. 우선은 사진이 있는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시작이 될 것같습니다.”

작가는 “이제 나이가 있어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몰라 쉽게 얘기하는 게 두렵지만 여튼 매달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성의 주체성을 살피고, 부조리한 가부장적 젠더 문화를 꼬집으며, 생명존중과 모성애의 의미를 재해석한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작가. 원로 작가의 뜨거운 열정이 새삼 묵직하게 다가온다. 전시는 12월2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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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의 ‘소리’(왼쪽)와 ‘허난설헌’ 설치 전경. OCI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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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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