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7.01 (월)

이슈 미술의 세계

"약자들이 디디고 선 땅은 어째 더 얇아지는 것같아…", 원로작가 노원희 작품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노원희 작가의 ‘무기를 들고’( 2018), 캔버스에 유채, 162.2×130.3㎝×2. 학고재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예술과 삶은 서로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예술가적 소신을 지닌 노원희 작가(71)에게 지금의 세상은, 사회적 현실은 “얇은 땅”이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디디고 선 땅이 얇다. 사회적 약자, 소외된 이들의 발 밑은 더 얇다. 애를 쓰지만 두터워지지 않는 얇은 땅 위의 삶은 위태롭다. 불안정적이고 흔들리는 삶이다.

그래서일까. 노 작가의 작품전 이름은 ‘얇은 땅 위에’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전시명에 여러 의미가 담긴 듯하다”고 하자 “약자들이 디디고 선 땅이 어째 더 얇아지는 것같다”고 안타까워한다. ‘얇은 땅 위에’란 한 구절에 예술가로서의 비판적 통찰이, 약자들을 향한 원로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응축돼 있다.

경향신문

노원희 작가의 ‘얇은 땅 위에’(2019), 캔버스에 아크릴릭·유채, 162.1×130.3㎝×2. 학고재 갤러리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현실은 얇은 땅입니다. 나는 그 위에서 내 머리 속에 있는 입을 벌려 세상사를 삼킵니다. 그 세상사 중의 일부를 캔버스에 붙들어 놓는 것이지요.” 학고재 갤러리(서울 삼청로)에 마련된 전시회에는 작가가 ‘붙들어 놓은’ 작품 36점이 나왔다. 1990년대 중반부터 최신작까지다.

갖가지 몸짓의 인물, 일상적 사물·풍경에 작가는 특유의 조형의식으로 사회의 구조적 문제나 부조리를 녹여낸다. 얇은 땅 위에 선 사람들의 고통, 현실을 마주하는 전시회다. 또 1980년대 민중미술의 축인 ‘현실과 발언’ 동인이자, 비판적 현실주의와 여성주의 시각을 견지해온 작가의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경향신문

노원희 작가의 ‘광장의 사람들’(2018),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3×162.1㎝×2. 학고재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작들은 구체적 사건들과 그 사건 속 사람들이 소재다. 현대중공업·쌍용차 노조원들의 집회나 고공농성, 삼성반도체 산재나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 광장 사람들 등이다. 작품 ‘얇은 땅 위에’는 엎드린 노동자들과 권력·거대 자본으로 상징되는 인물이 극적으로 대비된다. 화면 중앙의 거대한 벽은 불통을 암시하듯 견고해 보인다. ‘기념비 자리2’는 위압적인 굴뚝 아래에 무덤·인물들이 자리한다. 뭉그러지게 표현된 인물들과 달리 안전모·방진 마스크를 쓰고 정면을 보는 청년은 화력발전소에서 숨진 김용균씨다. 작가는 김씨처럼 열심히 살았지만 얇아 지는 땅 위에서 죽어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이렇게 추모한다. 이목구비가 없는 흐릿한 인물 표현을 통해 작가는 그들을 잊은 사회, 우리들을 나무라는 듯하다. 그래서 작품으로 ‘기억투쟁’을 벌인다. ‘광장의 사람들’에는 실제 작가가 보고 들은 사람들의 실명을 화폭에 기록하고 있다.

얇은 땅 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다. ‘청년의 봄’(2003)은 청년들의 절망과 불안한 심정이 적나라하고, ‘집 구하러 다니기’(2006)에는 내 가족이 살아갈 조그만 집 구하기도 쉽지 않은 사람들의 걱정이 담겼다. ‘돼지국밥 30년’은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애틋한 헌사로 보인다.

경향신문

노원희 작가의 ‘청년의 봄’( 2003), 캔버스에 아크릴릭, 60.6×72.7㎝. 학고재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여성주의적 시각이 돋보이는 작품들도 눈길을 끈다. 전시장 들머리에 걸린 ‘포럼’, 미투운동이 소재가 된 ‘인류의 고민’은 남성 중심의 사회, 남성들의 일방적·폭력적 성 의식은 물론 남근성으로 상징되는 권력욕과 위선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연작 ‘오래된 살림살이’ 등은 가부장적 구조 속에서의 여성의 삶을 살폈다.

근작들에는 화면에 흰색 공간이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원래 텍스트를 넣는 공간으로 설정하고 시도도 했으나 지웠다”는 작가는 “침묵의 공간”이라고 말한다.“침묵, 말이 멈춘다는 것은 결국 억압과 연관된다는 의미”다. 관람객은 저마다 다양하게 그 빈 공간을 해석할 수 있다.

약자들은 얇은 땅 위에 살아가지만 결코 삶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언제 두터운 땅이 있었던가. 작가는 ‘스스로 두텁게 쌓아야지’라고 강조하는 듯 프라이팬을 들고 우뚝 서서 시위하는 작품도 내걸었다. ‘무기를 들고’다. 폭력을 암시하는 이미지를 배경으로 선 사람들의 손에서, 꼿꼿한 몸에서 단호한 저항의식이 드러난다. 작가는 “그야말로 생명을 살리는 살림살이로 삶을 살려내자는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노원희 작가의 작품전 ‘얇은 땅 위에’의 전시장 모습. 학고재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작가는 지난 40여년 사회적 현실을 방관하지 않는 작가로, 교수로 후학을 가르쳤다. “치열한 삶이라기보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살아온 삶이죠. 나름대로 충실한 삶이었습니다.” 그 어떤 현학적 수사보다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작가의 삶은 ‘머리가 복잡하다’, 1995년 작품으로 도발적인 ‘자화상 1’에서 엿보인다. 징검다리마다에 고뇌에 찬 인물을 배치한 ‘머리가 복잡하다’에서 화면 왼쪽 아래에는 시장을 다녀오는 작가가 선명하다. 일상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초상이다.

여전히 꾸준하게 작업하는 작가는 향후 계획을 묻자 “폭력의 순환에 관심이 많다”고 밝혔다. 이번 작품전에 나온 ‘참전 이야기1’과 ‘참전 이야기2’가 그 시작으로 참전 군인인 가장의 폭력성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앞으로 전쟁은 물론 국가 폭력, 자본·권력의 폭력, 가정·데이트 폭력 등 일상 속 폭력의 악순환을 작가의 예민한 시각으로 담아내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전시는 12월 1일까지.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신문 최신기사

▶ 기사 제보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