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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땅바닥’에서도 존엄의 장미가 피어날 거야, 언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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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계 보육사가 영국 빈곤층 탁아소에서 겪은 보수당 ‘긴축정치’

‘정치’에 살고 죽는 밑바닥의 삶 통해 계급·인종·인권문제 망라


한겨레

아이들의 계급투쟁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사계절·1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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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피스톨스가 너무 좋아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무작정 영국으로 건너가 20년 넘게 머물고 있는 일본인 브래디 미카코는 글 쓰는 보육사다. 그는 2008년 “평균 수입, 실업률, 질병률이 영국 전역에서 최악의 1%에 속하는” 브라이턴 빈민가의 ‘무직자와 저소득자를 위한 지원센터’ 부설 무료탁아소에서 2년간 자원봉사를 하다 보육사 자격증을 땄다. 2010~2015년 5년간 유급 보육사로 일하던 민간어린이집이 인종차별에 얽힌 억울한 일로 망하는 바람에 브라이턴의 탁아소로 다시 돌아온 미카코는 정부의 ‘긴축정책’으로 2016년 탁아소가 문을 닫기까지 아이들과 함께한다. 두차례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면서 그가 포착한 것은 토니 블레어·고든 브라운 총리의 노동당 집권기(2007~2010)와 데이비드 캐머런이 이끄는 보수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2010~ ) 벌어진 가난한 사람들의 변화였다. 보수당 시기의 ‘긴축 탁아소’와 노동당 시기의 ‘저변 탁아소’ 생활을 나눠 비교한 <아이들의 계급투쟁>은 2017년 일본에서 발간된 뒤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나의 본업은 아주 미시적인 일이라서 이른바 거시적인 시선으로 멋지게 부감하는 능력이 없다”고 쓴 서문이 무색할 정도로, 이 책은 사회 밑바닥 어린이를 상대하는 돌봄노동자의 위치에서 영국의 정치와 사회를 해부한 예리한 사회과학서이다. 탁아소에서 만난 동료, 아이들과 부모의 이야기는 인종차별, 계급격차, 아동인권 그리고 인간 존엄성의 문제를 망라한다. 미카코가 현장에서 길어올린 빛나는 문장들로 <아이들의 계급투쟁>을 다시 읽어본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로 요약되는 영국 복지정책의 기반은 대처가 주도한 대규모 산업 구조조정과 민영화로 무너져내렸다. 노동자계급의 존엄성을 잃어버리게 만든 대처를 향해 지은이는 통렬한 비판을 내놓는다. “대처는 경제전환기의 희생자를 ‘패자’라는 이름의 무직자로 만들고 단지 금전만을 허락하며 국가의 가축으로 만들어 길렀다. 영국에 살아보니 대처가 저지른 죄가 진정 어떤 것이었는지 알 것 같다.” 토니 블레어의 복지정책에 대해서도 지은이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생활보호수당에 의존해 살아가는 ‘언더 클래스’에게 “마치 마약상처럼” 생활보호수당·육아수당 등을 쥐여주기만 했다는 것이다. 비록 노동당 집권시기 보육에 교육적 관점이 강화됐고, 인종적 다양성을 고려해 외국인 보육사를 늘리는 등 진보적인 시도도 이뤄졌으나, 정부가 주는 돈에만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기력해졌다. ‘브로큰 브리튼’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집권한 보수당은 복지·교육·의료 분야에서 대대적인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브라이턴의 무직자·저소득자 지원센터는 ‘1파운드 식당’의 영업 일수를 주3회에서 주2회로 줄였고, 탁아소 예산도 줄어들어 더이상 새로운 장난감이나 교구를 살 수 없었다. 곳곳에선 아동용 코트 기부, 빈곤층 아이들을 위한 무료아침식사 제공 캠페인이 벌어졌다. 지은이는 통탄한다. “영국의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빈곤한 적은 없었다. (…) 갑자기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갔다.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면 정치의 변화가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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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가 처음 브라이턴에서 일하던 때는 탁아소에 오는 아이들 대부분이 하층계급 출신이었는데 5년 만에 ‘긴축 탁아소’로 다시 돌아와보니 주로 이민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외국인을 위한 지원시설이 줄어들어 외국인들이 무직자·저소득층 지원센터로 몰리게 됐고, 그러다보니 영국의 빈곤층은 센터 이용 빈도가 낮아졌다. 영어가 서툴지만 새로운 삶을 찾아 국경을 넘어 온 이민자들은 신분상승의 욕구와 교육열로 투지가 넘친 반면, 기존 하층계급은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이민자들은 영국 언더클래스를 ‘화이트 트래시’라고 비하하며 자기의 아이들과 섞이지 않길 바랐고, 자신이 다른 인종을 차별하는 데도 무감각하다. 그의 동료는 직시한다. “계급은 그 자리에서 이동 가능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에 붙은 명칭이야.” 자수성가한 베트남인 부모가 자신의 아들 생일파티에 흑인 아이만 초대하지 않는 걸 보면서 지은이는 씁쓸해한다. “혐오의 사슬 안에 어른들이 아이들을 밀어넣고 있다.” 아무리 탁아소 부모들끼리 아웅다웅하더라도 그래도 확실한 ‘공동체적’ 면모가 있었던 5년 전과 달리, 서로에 대한 차별·배제·혐오가 만연해진 상황은 ‘반긴축’의 신념을 굳히게 만든다. 동료는 푸념했다. “재정지출이 줄어들면 사람의 마음도 작아지는 모양이야.”

이처럼 인종과 계급, 빈곤이 뒤얽힌 현장은 현지인/이주민, 기독교/무슬림의 통상적 이분법을 깨뜨린다. 지은이 본인이 저임금을 받는 맞벌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더욱 섬세하게 모순의 뼈와 살을 갈라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날 불량한 복장을 한 전형적인 하층 청소년 비키가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자원봉사를 맡게 되자, 외국인 어머니들은 “문제있는 집안 아이”라며 떼로 몰려와 항의한다. 이란 출신의 탁아소 책임자는 단호하게 맞선다. “이곳은 어디서 온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문제를 가진 사람이든 환영한다는 이념으로 만든 탁아소다. 직원이 바뀌더라도 이 정신은 변함없다.” 지은이는 이 장면을 지켜보며 적었다. “지역의 영국인을 배제하려는 이민자를 꾸짖는 무슬림 여성이 여기에 있다. 살아 있는 유기체인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좀더 깊숙한 무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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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아이들을 돌보는 데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알코올·마약·섹스·폭력에 젖은 어른들 밑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중산층 아이들에 비해 ‘정서지능’이 현저히 떨어지고, 폭력적이며 산만하다. 아이들에게 웃는 얼굴 사진을 보여주면서 어떨 때 웃는지 말해보라고 했더니 “사람을 죽였을 때”라는 섬뜩한 말이 흘러나오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뿐 아니라 뾰족한 물건으로 친구들을 찔러대는 ‘흉기파’도 있다. 한 꼬맹이는 “너의 외국인 발음이 내 영어를 망친다”며 네이티브가 아닌 지은이의 가슴을 후벼판다. 어떤 영문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을 데리고 모처럼 소풍을 나가면 항상 날씨가 험악해져 기분을 망친다. 한마디로 탁아소 아이들에겐 ‘어쩌다 한가닥 행운’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와 동료들은 아이들의 무표정, 거부하는 몸짓 뒤에 숨어 있는 깊은 슬픔과 두려움을 읽어낸다. 본래 브라이턴의 탁아소 출신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다시 보육사로 돌아온 로자리는 어른들의 손길이 닿으면 화들짝 놀라는 아이에게 말한다. “깜짝깜짝 놀라면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너를 더 때리고 싶어하는 어른들이 있다. 당당해야 해.” 탁아소 문을 닫을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엄마가 오지 않자 훌쩍이는 아이를 바라보며 지은이는 속으로 되뇐다. “울지 마, 울지 말고 화를 내. 우는 건 포기했다는 뜻이야. 우리는 항상 화를 내지 않으면 안 돼.”

근근이 유지되던 탁아소는 끝내 폐쇄되고 배곯는 사람들을 위한 ‘푸드뱅크’가 되고 만다. 보육은커녕 하루의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는 가족이 너무나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무질서하면서도 활기가 넘쳤던 노동당 시절의 ‘저변 탁아소’와 철제선반에 통조림이 가지런히 놓인 보수당 정권의 ‘푸드뱅크’를 비교하면서 과연 무엇이 변한 것인지 곱씹는다. “그동안 사라진 것은 아나키즘이라는 ‘존엄성’이었다. 그것은 땅바닥의 진창에서 수분을 흡수하고, 햇빛을 받지 못하는 가장 열악한 토양에서도 당돌하게 통통한 꽃을 피워내는 장미다.”

지은이는 이 검붉은 장미를 다시 피워내는 데는 정치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탁아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정치 때문에 살기도 하고, 고통을 겪기도 하고, 도움을 받거나 배를 곯기도 했다. (…) 저변 탁아소와 긴축 탁아소는 땅바닥과 정치학을 이어주는 장소였다. 땅바닥에는 정치가 굴러다니고 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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