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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이슈 미술의 세계

"공동체성이 사라진 이 시대, 새로운 모임을 상상한다", 국립현대미술관 '모임' 전 연 박찬경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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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중진작가 박찬경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MMCA 현대차 시리즈’로 작품전 ‘모임’을 열고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박 작가는 “새로운 모임과 유대, 나아가 공동체를 상상해보자”고 말한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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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진작가 박찬경(54)의 작품전 ‘모임 GATHERING’이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제5전시실을 찾았다. 평일임에도 40여 명의 관람객이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다. 전시장을 나서는 관람객들, 특히 미술에 관심이 있어 “전시장을 자주 찾는 편”이라는 관람객들에게 물었다. “전시가 어땠냐”고. 저마다 조금씩 다른 평가를 내렸지만 공통점이 하나 발견됐다.

“작품마다 뭔가 더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한데…, 작품을 온전히 다 이해했는 지 잘 모르겠다”고. 개념미술로 특징지워지는 현대미술 작품에는 작가가 의도한 개념이 깊이 투영된다. 관람객으로선 작품을 감상·이해하거나 읽어내는 데 다양한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전시장에서 박 작가를 만났다. “세월호 참사, 후쿠시마 원전폭발 같은 재난이 만연화되고, 넷플릭스의 한 카테고리인 ‘현실 붕괴’의 시대입니다. 모임과 유대나 연대, 나아가 이상적 공동체를 상상하기가 사실상 힘든 시대죠. 이 시대에 예술은, 미술가는, 미술관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박 작가는 이같은 질문에서 이번 전시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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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경의 설치작품 ‘해인(海印)’. 시멘트 판 16개 마다에 파도 무늬를 새겨 넣어 속성이 모순되는 ‘시멘트 바다’를 만들었다. 사진 홍철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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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서양화,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한 박 작가는 영상과 사진, 설치는 물론 전시기획·비평도 한다. 영화로도 주목받고, 형 박찬욱 감독과 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배척·소외된 것들에 관심을 작품에 담아왔다. 상상력의 원천이지만 ‘미신’으로 배제된 무속같은 민간신앙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분단 문제 등 사회성 짙은 작품 등도 국내외에서 주목받았다. 이번 ‘모임’ 전은 해마다 1명의 중진작가를 선정,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MMCA(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로 마련돼 모두 9점(신작 8점)을 선보이고 있다. 이 시리즈로 그동안 이불 안규철 김수자 임흥순 최정화 작가가 작품전을 가졌다.

전시장은 기존 미술사·미술관에 비판적 시각을 담은 설치 ‘작은 미술관’으로 시작된다. 이어 불교 개념인 해인(海印)을 16개의 시멘트 판으로 해석한 설치 ‘해인’, 원전폭발 사고 이후 후쿠시마의 풍경을 담은 작가의 사진과 그 지역 생물·사물의 방사능을 오토래디오그래피(방사성 물질의 분포를 사진으로 나타내는 기법)로 드러낸 일본 작가와의 협업인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 등이 있다. 한쪽에는 전통건축물의 주련처럼 양쪽 입구 벽에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따온 구절과 불경 <천수경>에서 따온 구절을 쓴 ‘주련’을 통과해 들어서면 55분에 이르는 흑백 네거티브 영상 ‘늦게 온 보살’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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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경의 ‘작은 미술관’ 설치 전경. 20여점의 작품 이미지와 영상 등으로 구성, 기존 미술사·미술관의 역할과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홍철기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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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부처의 일생을 8개의 그림으로 표현한 팔상도의 마지막 그림인 쌍림열반도에 등장한 동물들을 촬영한 사진 ‘모임’, 불교의 곽시쌍부(槨示雙趺) 설화를 기계장치로 형상화한 ‘맨발’이 이어진다. 전시장 마지막은 이번 ‘모임’ 전이 열리고 있는 제5전시실을 축소한 건축모형과 7개의 징으로 북두칠성을 형상화한 설치 등으로 구성된 ‘5전시실’이다.

이전 작품들 처럼 신작들도 은유적이고, 의미 또한 중층적이다. 인문학적 조사·연구를 기반으로 작가의 예술적 상상력까지 응축시켜서다. 작품 관람은 보이는 대로 쉽게 감상할 수도 있지만 세심히 파고들어 갖은 상상력까지 동원할 수도 있다. 사실 9개 작품은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작품의 관계, 작품내 구성요소들을 살펴보면 사람들의 모임, 유대 등의 개념으로 서로 얽히고설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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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경의 사진작품 ‘모임’과 설치작품 ‘맨발’이 전시된 모습. 홍철기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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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미술관’에 내걸린 20여 이미지들 가운데 전선택의 유화 ‘초대’나 정서영의 ‘탑’, 이응노의 ‘군상’ 등 상당수는 간절한 기원을 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 작가는 “어떤 간절한 염원은 우리들을 연결시켜주는 모임의 매개로 중요하다”며 “특히 ‘군상’의 이미지는 인간 사회의 유토피아적 공동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늦게 온 보살’ ‘모임’ ‘맨발’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 등도 마찬가지다. 부처의 열반을 계기로 이뤄진 모임, 곧 제의이지만 부처 대신 누군가의 죽음·재난으로 대체, 그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다. “서구적 근대화 속에서 우리는 삶의 또다른 모습인 죽음을, 모임을 가능케하는 제의를 배척했어요. 이는 죽음이나 재난, 제의(모임)가 또다른 국면, 새로운 사회와 세상을 만들수 있는 가능성·상상력을 지워버린 꼴이죠.”

박 작가는 “이 시대를 대변하는 위기의 하나는 모임, 유대가 희박해져 ‘군상’이 보여주는 이상적 공동체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라며 “그럼에도 불구, 이번 전시를 통해 예술과 미술관은 모임과 유대, 공동체를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강조한다. “모임이나 유대는 세월호 참사 같은 재난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유대, 이데올로기적 유대 등도 의미 있지만, 곽시쌍부 설화처럼 열반한 부처가 제자 가섭이 오자 두 발을 살짝 관 밖으로 내미는 자그마한 상징적 행위로도 가능할 것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어쩌면 이번 전시를 통해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저서 <도래하는 공동체>에서 탐색한 공동체, 그 공동체를 꾸릴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태도를 모색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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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경의 55분에 이르는 흑백 네거티브 영상작품 ‘늦게 온 보살’의 한 장면. 사진 홍철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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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전은 묵직한 주제와는 또다르게 작품들을 개별적으로 감상할 수도 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측면을 작가의 독특한 시선과 예술적 미감으로 시각화해서다.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는 후쿠시마의 봄날 풍경 사진과 비가시적인 방사능을 시각적으로 드러내 보이려는 X레이 사진같은 오토래디오그래피가 교차·영사되면서 원전폭발이라는 엄청난 재난이 얼마나 비실재적이고 비가시적으로 여겨지는 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역설과 아이러니는 일제강점기 당시 식민 조선의 일상용품을 미학적으로 치켜세운 일본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 사진(‘작은 미술관’)이나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동물들인데 화려하고 장식적인 모습(‘모임’) 등에서도 엿보인다. 시멘트 판에 파도를 새겨 ‘시멘트 바다’라고 할 수 있는 ‘해인’은 유동적인 바다(물)와 딱딱한 시멘트의 모순된 속성을 통해 가짜뉴스 등 “이미지와 데이터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세태”를 성찰하게 한다.

전시장 구조나 작품 배치 등에서도 작가의 치밀한 개입이 나타난다. ‘작은 미술관’은 위압적인 기존 미술관과 달리 낮은 벽, 뚫어진 창문들, 공간들의 연결을 통해 교감·소통을 강조한다. 이는 작가가 담양 소쇄원의 담장 이미지를 내건 이유로 보인다. 소쇄원의 담장은 자연과 소쇄원을 분리·차단하지 않고 오히려 그 둘을 하나로 소통하게 만든 전통건축의 지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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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경 작가는 ‘모임’ 전 전시장에 여러 건축적 요소들을 도입해 미술관의 전시장 자체를 사람들의 모임이 이뤄질 수 있는 하나의 큰 집, 공간으로 만들었다. 사진 홍철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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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전체의 구조를 따져보면 하나의 넓은 집, 공간을 형상화한 듯하다. ‘작은 미술관’은 회랑에 해당하고, 들마루까지 놓인 전시장 중앙의 ‘해인’은 넓은 마당이다. ‘늦게 온 보살’이나 ‘모임’ 등의 전시공간은 본채나 건물들이며, ‘5전시실’은 뒷마당으로 여겨진다. 실제 전시장에서는 오는 8일 조선령 부산대 교수를 비롯해 미술사학자 목수현(14일), 조인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21일), 일본 사진가 카가야 마사미치(28일). 작가 정서영(12월 5일)이 초대돼 강연과 토론이 열린다.

작가는 ‘모임’ 전을 통해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을 아예 사람들의 모임이 이뤄지는 특별한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순진할 수도 있지만 아직 예술은 모임을, 유대를 가능케하고 미술관은 몇 남지 않은 희망의 장소가 아닐까 생각된다”며 이 시대 예술과 미술관의 역할을 제안한다.

전시장 마지막은 7개의 징을 별처럼 벽에 붙여 (북두)칠성 형상을 나타낸다. 근대화 이전 수백년 동안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들은 북두칠성을 향해 정한수를 떠놓고 간절한 염원을 담아냈다. 어쩌면 전시장의 칠성은 작가의 애틋한 기원을 상징하는 듯하다. 전시는 내년 2월23일까지.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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