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정상들 일정 꼬여
새 장소·시기 확정 어려워
무역협상 서명 추진 미·중
별도 정상회담 장소 물색
경제적 불평등에 항의하는 칠레 시위대가 30일(현지시간) 수도 산티아고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피해 흩어지고 있다. 산티아고 |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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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부 시위가 격화하면서 홍역을 앓고 있는 칠레 정부가 30일(현지시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전격 취소했다. 개막을 17일 앞둔 시점이었다. APEC을 계기로 열릴 것으로 예상됐던 미·중 정상회담 등 각종 정상 간 만남 여부가 불투명해지는 등 정상들의 일정이 꼬였다. 지하철 요금 30페소(약 50원) 인상으로 촉발된 시위 사태가 사상 초유의 국제회의 취소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는 11월 APEC 정상회의와 12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 25)를 개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고 칠레 언론과 AP통신 등이 전했다. 피녜라 대통령은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이 결정으로 APEC과 COP에 생길 문제와 불편에 깊은 유감을 전한다”고 말했다. 31회째인 올해 행사는 오는 16∼17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칠레 시위는 지난 18일 정부가 지하철 요금을 피크타임 기준 800페소(약 1280원)에서 830페소(약 1330원)로 인상한 데 반발해 시작됐다. 정부는 지하철 요금 인상을 철회하고 연금·임금 인상 대책도 내놨으나 시위는 불평등 개선과 헌법 개정 등 전면적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확산하고 있다.
칠레 정부는 회의 개최에 지장이 없다고 했으나, 민심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전격적으로 취소 결정을 내렸다.
APEC은 1989년 호주 캔버라에서 12개국 간 각료회의 개최로 출범해 현재 한국, 미국, 중국, 일본, 캐나다, 호주, 러시아 등 21개국이 참가하는 느슨한 형태의 국가 간 협력체로, 역내 대표적인 최고위급 협력체이다. 1989년 호주 캔버라에서 첫 회의가 열린 후 30년 동안 회의가 중단된 적은 없었다. 2006년 11월 필리핀 세부에서 예정됐던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정상회의가 자연재해 등을 이유로 한 달간 연기된 적은 있으나, 중요도와 규모에서 APEC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APEC 사무국은 홈페이지를 통해 “칠레의 결정을 존중한다”고만 밝혔을 뿐 정상회의를 다른 장소에서 개최할지 여부 등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올해 행사를 건너뛰거나, 혹은 시기를 늦춰 다른 국가 등 ‘대체지’를 찾아 개최하는 방안 등이 거론될 수 있다. 21개국 정상들의 일정을 조율해야 하는 데다 정상들의 신변 보안 문제도 있는 만큼 새 장소를 물색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정상들의 일정도 꼬였다. APEC 기간을 계기로 정상회담을 열고 무역협상 1단계 합의에 서명하려 했던 미국과 중국은 다른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마카오, 알래스카, 하와이 등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과 중국은 ‘합의에는 지장이 없다’는 입장이다. 호건 기들리 백악관 부대변인은 “우리는 같은 ‘시간 프레임’ 내에 중국과의 역사적인 1단계 합의를 마무리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중국 상무부 역시 대변인 명의 성명을 통해 “양국은 원래의 계획에 따라 협상 등 업무를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과 연쇄 정상회동을 통해 무역전쟁의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구상 등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 발전 모델로 꼽혔던 칠레는 뿌리 깊은 불평등에 항의하는 시위로 정상회의가 취소되면서 1990년 군사독재 종식 후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뤄낸 국가라는 이미지에 타격을 입게 됐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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