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잡지 명멸 가운데 전문성·고급화 추구하는 잡지들 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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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할 듯 보이지만 사라지지 않는 건 없다.
잡지 역시 그렇다. 내년 창간 50돌을 코앞에 둔 월간 <샘터>가 폐간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애독자는 물론, ‘어쩌다’ ‘우연히’ <샘터>를 봤던 이들조차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그만큼 오랫동안 한국인의 삶에 녹아들어 체취처럼 익숙했다는 얘기인데, 새로운 주인을 만나지 않는 한 <샘터>는 우리 곁에 잔향처럼 떠돌다 한국잡지사의 한 챕터로 남게 될 것 같다. 그러잖아도 저물어가는 종이의 시대. 오프라인 잡지의 시대는 황혼녘을 지나 밤의 영역으로 발을 디딘 걸까?
‘명멸과 부침’ 잡지의 속성
천정환(성균관대 국문과 교수)은 잡지의 기본 속성이 ‘명멸’과 ‘부침’이라고 말한다. 그는 저서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마음산책)을 통해 “잡지는 신문과 달리 몇 명의 동인들만으로 발간할 수 있고 최소한의 수익과 최소한의 독자와의 피드백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생산이 가능하다. 지적으로나 매체 문제에 있어서 ‘아마추어’도 얼마든지 잡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명멸과 부침이 매우 심하다”고 설명했다. 가볍고 유연해서 등장·퇴장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뿐더러, 확실한 독자층을 바탕으로 강한 목표 지향성을 지닌 것도 특징이다. 한국 최초의 잡지 또한 계몽성이 짙은 서재필의 <대죠선독립협회회보>(1896년)였다. 1927년 경성(서울)의 권번 기생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장한>이라는 잡지를 창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공동체’는 잡지의 주요한 토대다.
분출된 지성 반영한 ‘잡지 전성시대’
잡지는 시대의 에너지를 반영한다. 구한말엔 계몽의 창구였고, 일제강점기엔 ‘모던’과 ‘이즘’의 확산이 잡지를 통해 이뤄졌다. 천정환은 해방 이후 잡지사를 이렇게 구분한다. 분출된 민족감정 시기-한국전쟁 이후 재건의 에너지-4·19혁명 이후 분출된 지성과 문화의 욕구-1970년대 개발독재시대의 ‘유신스러움’과 그에 맞선 저항-1980년대 운동의 시기-1990년대 문자문화의 마지막 전성기-2000년대 이후. <개벽> <사상계> <현대문학> <청맥> <선데이 서울> <월간문학> <씨알의 소리> <뿌리깊은 나무> <문학과 지성> <샘이 깊은 물> <동향과 전망> <경제와 사회> <말> <사회평론> <녹색평론> <우리교육> <이프> <작은책> <당대비평> <인물과 사상> <아웃사이더> <월간잉여> <말과 활> 등이 이 시간을 스쳐 갔거나 관통해왔다. 특히 이 가운데 지식인층 독자를 대상으로 창간한 계간지 <창작과 비평>, 한국 최초의 종합예술지로 탄생한 김수근의 월간 <공간>은 1966년 같은 해 태어나 지금까지 50년 넘는 세월을 지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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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교양’에서 ‘개인’의 시대로
출판업계에선 비록 종이 매체가 압도적인 웹의 힘에 밀리는 형세이지만, 최근 몇 년 새 다양한 영역의 마니아층을 노리며 분화해가면서 ‘잡지스러움’이 개화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집계한 정기간행물 등록현황을 보면, 2000년에 등록된 잡지는 5945개인데, 이 숫자는 2009년 이후 1만개를 돌파해 2018년엔 1만9898개에 이르렀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독자들의 요구에 맞춰서 정보를 조직하는 큐레이션형, 특정한 아이템 하나를 잡아서 깊게 파고 들어가는 테마형, 마니아들이 취미와 직업을 동시에 심화시켜나가는 독립형 잡지 등이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종이 잡지가 망했다는 말이 돌 때 유럽에선 <모노클>처럼 디자인·이미지·편집이 뛰어난 퀄리티 높은 매체가 등장해 잡지 흐름을 바꿨는데 한국도 역시 ‘어번라이프’를 즐기는 코스모폴리탄 계층이 늘어나면서 개성 있고 취향 중심적인 라이프스타일 잡지가 부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뉴필로소퍼>의 장동석 편집장은 “종합교양의 시대 대신 확실한 독립적인 개인의 시대가 열린 것”이라고 평했다.
과월호도 일부러 구해서 본다
밀레니얼 세대, ‘혼라이프’ 세대를 겨냥한 <디렉토리> <베뉴>, 옛 소련의 최초 유인 우주선 이름을 딴 사진전문 매체 <보스토크>, ‘사소한 행복’에 대해 다루는 아웃도어힐링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어라운드>, 젊은 감각의 문예지 <악스트> <릿터>, 과학전문 잡지 <스켑틱>, 스스로 물건을 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과학잡지 <메이커스>, 페미니즘 전문지 <우먼카인드>, 생활철학잡지를 표방한 <뉴필로소퍼>, 다양한 일상의 이야기를 감성적으로 다루는 <킨포크>, 음식전문 잡지 <매거진 에프>, 제주생활문화를 소개하는 (I’m in island now의 준말), 30~40대 아빠들을 위한 잡지 <볼드 저널> 등 주제가 다채롭다. 신발만 소개하는 <아이템 매거진>, 명상 전문지 <브리드> 등도 있다. 이런 잡지 대부분은 ‘한번에 하나만 판다’ ‘지나간 것도 다시 보기’로 요약된다. 교보문고 브랜드관리팀 김현정씨는 “하나의 주제를 다각도로 다루면서 정보를 입체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장점”이라며 “예전엔 과월호는 그냥 재고로 쌓일 뿐이었지만, 종합적인 정보를 한번에 보길 원하는 독자들은 지나간 호도 구해서 본다”고 설명했다.
출판전문가들은 이런 경향을 이끈 주역으로 2011년 창간한 <매거진 B>를 일제히 꼽는다. 네이버 디자인 총괄을 역임한 조수용(현 카카오 공동대표)이 ‘브랜드 다큐멘터리 매거진’을 표방하며 창간한 이 잡지는 재활용 브랜드 <프라이탁>을 시작으로 매 호에 단 한 개의 국내외 브랜드를 집중 탐구해왔다. <매거진 B>는 <한겨레>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특정 브랜드에 애착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 잡지를 소장하는 것이 마치 그 브랜드 물건을 소유하는 것과 동일한 경험을 제공한다”며 “잡지 자체가 소장하고 싶은 물건이 되고자 했던 의도가 실현되고 있다”고 자평했다. 이어 “국·영문 합쳐 한 호당 평균 2만부 가까이 팔리고 있으며 레고, 라이카, 무인양품 등을 다룬 호는 4~5쇄까지 찍었다”고 밝혔다.
비록 한정된 독자층을 지니고 있지만, 잘 만든 잡지는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며 새로운 가치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가령 ‘젠더’를 특집으로 다룬 <볼드 저널>이 그런 사례다. 성정아 <볼드 저널> 콘텐츠 디렉터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우린 재쇄를 찍지 않고 한정판이 원칙인데 ‘젠더’ 특집호 등은 품절돼 중고사이트 등에서 거래가 될 정도”라며 “우리는 이 잡지를 중심으로 일-가정에서 균형을 잡고 창의적으로 살아가려는 데 동의하는 남성 독자들을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키워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예스24의 최지혜 마케팅팀 과장은 “개인의 삶을 다루는 잡지들의 독자층은 뚜렷이 형성되고 있다”며 “이런 잡지들이 소량 다품종으로 계속 등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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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전문가가 뽑은 최고의 잡지는?
고경태 22세기미디어 대표, 윤철호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장동석 <뉴필로소퍼> 편집장,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등에게 복수의 잡지를 골라달라고 했다. 출판전문가로서 느끼는 새로움과 혁신성, 디자인과 편집의 뛰어남, 사회적인 책무와 공공성 등의 맥락에서 자유롭게 선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모두 첫손에 꼽은 건 <뿌리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이들은 두 잡지의 발행인인 ‘한창기’에 대한 깊은 존경을 표현했다. “대중에게 우리의 것이 살아 있음을 알려준 가장 선진적인 잡지”(장동석), “명품잡지의 맛과 멋을 깨닫게 한 잡지”(고경태) 등의 평가였다. ‘시대의 등불’ 역할을 하다가 김지하의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1970년 강제폐간당한 <사상계>(장은수), 1970년대 지성인의 사회적 역할을 촉구한 <창작과 비평>(윤철호)도 꼽혔다. 장동석 편집장은 사진전문지 <보스토크>(“이미지 범람의 시대에 정지된 시간을 포착하는 사진의 의미를 깊이 있게 보여준다”)와 <좋은 생각>(“1990년대 괴담의 시대에 미담의 공간을 만들었고 최대 발행부수 70만을 기록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을 선택했고, 고경태 대표는 <선데이 서울>(“한국 황색잡지의 레전드로 독재시대엔 선정적인 쾌락주의가 관제언론보다 더 건강했다”)과 <소년중앙>(”만화잡지 만개 이전에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준 소박한 잡지”), <지큐>(“패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알려준 럭셔리 남성지”) 등을 선정했다. 윤철호 회장은 제도적 민주화의 공간이 열리기 이전인 1980년대에 노동운동을 대표한 <노동의 길>,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기관지 <민주화의 길>을 골랐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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