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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낱말, 1919년 3·1운동 이후 대중에 본격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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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교수 25일 역사학대회 논문서 밝혀

구글 창에 ‘민족’을 넣으면 약 4110만 개의 각종 자료가 검색된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이 낱말을 널리 사용한 건 100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1919년 3·1운동이 ‘민족’이라는 단어를 대중에 전파했고, 사회 각계각층의 근대적 단체 결성을 촉발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지체된 근대로의 전환, 1919년’이라는 논문에서 “‘민족’이라는 낱말이 확산한 건 3·1독립선언서와 이후 발간한 한국어 신문 등 매체를 통해서였다”고 밝혔다.

박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한국에서 ‘民族(민족)’이 처음 사용된 건 1900년 황성신문이고, 1904년경부터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됐다. 그러나 민족은 비교적 낯선 말이었고, 대신 ‘동포’가 많이 쓰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당시 ‘국채보상기성회취지서’도 “우리 동포에게 포고한다”(대한매일신보)고 했다.

국권 피탈 이후 ‘민족’ 개념의 확산에 일대 전기가 된 건 3·1운동이었다. 3·1독립선언서에서 ‘민족’은 14회 등장해 가장 많이 사용한 명사다. 33인은 ‘민족대표’를 자임했다. 각종 지하신문과 전단에서도 ‘민족’은 빈번히 등장한다.

192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잡지 ‘개벽’ 등이 창간한 것도 ‘민족’이라는 용어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고 박 교수는 밝혔다. 동아일보는 지령 100호부터 3대 사시(社是) 가운데 하나로 ‘조선 민족의 의사를 표현함’을 내세웠다. 1920년 4월 6일 사설은 “민족은 역사적 산물”이며, “생명을 가진 실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대중은 독립선언서에 나오는 ‘민족’, ‘민족 자결’의 개념에 입각해 만세를 부르며 스스로 조선민족의 일원이라고 인식하게 됐다”면서 “민족의식은 민족 내부의 평등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근대적 성격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3·1운동은 ‘단체’의 확산도 불렀다. 1905년 을사늑약 뒤 여러 정치단체와 교육계몽단체가 등장했지만, 국권 피탈 이후 강제 해산돼 비밀결사로 이어졌다.

3·1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단체가 만들어졌다. 1922년 ‘조선치안상황’ 자료에 따르면 청년, 종교, 산업, 교육, 노동 단체와 소작인회 등 각종 사회단체 수가 1920년 579개에서 1922년 1525개로 늘었다. 동아일보가 각종 단체, 특히 청년회 조직을 독려한 것도 효과를 냈다. 박 교수는 “대중 계몽이나 공공 이익을 목표로 한 단체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근대적 성격을 띠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이 논문을 역사학계 최대 연례행사인 제62회 전국역사학대회 ‘현대의 탄생’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이 대회는 25,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과 성북구 고려대에서 열린다. 박종린 대회 조직위원장(한남대 교수)은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민주주의, 공화정의 확산을 비롯해 ‘현대’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대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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