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원'이라 이름한 주체는 일제 아닌 대한제국"
이곳에는 160여 종 수목이 자라며, 그 가운데 70수 이상은 수령 300년이 넘은 고목들이다. 세계 어느 나라 궁궐에서도 보기 힘든 경관의 명품 정원이라 하겠다.
항간에는 창덕궁 후원을 비원(秘苑)이라 이름한 주체가 일제강점기의 일본 사람인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분명한 오해로, 비원이라 이름 붙인 주체는 일제강점기 이전 대한제국이었다.
비원의 주합루와 부용지 일원 |
관람정 주변의 울창한 숲 |
문화재청 재직 시절 창덕궁관리소장을 역임한 신희권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신간 '창덕궁, 왕의 마음을 훔치다'에서 이 같은 연원을 다시 한번 환기한다.
고종 때인 광무 7년(1903년) 창덕궁 궁원을 관리하는 기구로 비원(秘院)을 뒀는데, 이듬해에 그 명칭을 '비밀스러운 정원'이라는 의미의 비원(秘苑)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다만 비원이라는 이름이 창덕궁보다 더 유명해지게 된 데는 일제강점기 이래 일본인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고 신 교수는 덧붙인다.
원래 왕을 위한 전용 공간이던 후원은 신하들조차 왕의 초대 없이는 드나들 수 없는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그랬던 창덕궁과 창경궁의 후원이 일제에 의해 일인 관료들의 연회 장소에 바뀐 데 이어 일반인들의 놀이 공간으로 전락하면서 서울 시민뿐 아니라 전국에서 몰려온 상춘객들의 관광지로 더 유명해졌다.
이 후원이 조성되기 시작한 때는 창덕궁이 창건된 이듬해인 1406년이었다. 태종은 후원 조성과 함께 이곳에 뽕나무를 심어 비빈과 후궁들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일깨워줬고, 1410년에는 소나무도 심어 풍광을 아름답게 가꾸었다. 이후 세조와 연산군 시기를 거치면서 경역이 더욱 확장됐다. 그리고 인조 때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틀을 잡았다.
본래 고고학 전공인 저자는 1995년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로 공직에 발을 들인 뒤 창덕궁관리소장,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장 등을 역임했다.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책을 출간해 창덕궁의 고고학·역사학을 넘나들며 고증한 창덕궁의 내밀한 멋과 매력을 사진과 더불어 다채롭게 보여준다. 창덕궁의 어제와 오늘을 새롭고 깊이 있게 알게 하는 안내서라고 하겠다.
역대 조선의 왕들이 가장 오랫동안 머무른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대한제국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실상 정궁 역할을 했다.
신 교수는 "창덕궁 후원은 자연 구릉지 곳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유락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한 원림이다"면서 "이곳의 나무들은 오랫동안 어울려 지내며 숲이라는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어 왔다"고 그 소중한 가치를 환기한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추천의 글에서 "창덕궁 구석구석을 발로 뛰던 저자는 일제강점기에 훼손되고 일그러진 조선 궁궐의 아픔을 통감했다. 궁궐을 위시한 문화유산 활용의 범위와 방법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지금, 이 책은 창덕궁을 예로 든 좋은 보고서이자 사례집이라 할 만하다"고 평가한다.
북촌. 255쪽. 2만3천원.
창덕궁, 왕의 마음을 훔치다 |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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