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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탈북모자 아사사건' 지켜본 탈북민단체 관계자의 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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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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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라디오 YTN]
■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20:20~21:00)
■ 방송일 : 2019년 10월 20일 (일요일)
■ 진행 : 김양원 PD
■ 대담 :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회장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탈북모자 아사사건' 지켜본 탈북민단체 관계자의 자책



◇ 김양원 PD(이하 김양원)> 지난 7월 말이었죠. 서울에 사는 탈북민 어머니와 7살 난 아들이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이른바 '탈북모자 아사사건'으로 언론에서 한 번쯤 들으셨을 텐데요. 어린 아들과 함께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을 찾아온 탈북민 40대 한 모 씨였습니다. 살아보기 위해 목숨 걸고 탈출해서 겨우 정착한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 이들 모자. 언론의 취재를 통해 밝혀진 것을 보면 그냥 가난해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안타깝게도 도움을 받을 수도, 받는 방법을 몰랐을 수도 있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데요. 아직도 광화문에는 이들 모자의 분향소가 남아 있습니다. 오늘 이 얘기 함께 나눠보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탈북난민인권연합의 김용화 회장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회장(이하 김용화)> 네, 안녕하세요.

◇ 김양원> 회장님께서 숨진 한 모 씨의 탈북을 도우셔서 한국에 정착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셨다고 들었어요.

◆ 김용화> 네, 맞습니다. 2009년도, 제가 그때 중국에 들어가 있을 때인데요. 남편 되는 분이 전화가 왔더라고요. 그래서 자기 집사람이 탈북자인데 조금 도와 달라고 해서 내용을 구체적으로 듣고 너무도 힘들게 살고 있는 것도 있고, 또 신분이 없기 때문에 언제 잡힐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도와줄 수 있냐고. 두 마디 없이 모 지역에 여러 명의 탈북자들하고 같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면 그쪽으로 보내라고 해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산골에서, 거기다가 시아버지도 있고, 또 아들도 있고, 너무 사는 게 힘든 것도 있지만.

◇ 김양원> 시부모까지 봉양하면서 중국인 남편과 산지에서 살고 있었군요?

◆ 김용화> 네. 그다음 날로 거리상으로는 800km 정도 되는 곳에서 차를 끌고 왔기 때문에 저는 깜짝 놀랐어요. 그때 올 때가 30대 초반인데, 저도 너무도 상상이 안 되더라고요.

◇ 김양원> 너무 외모가 30대 초반인데도 불구하고 고생을 많이 해서 나이가 들어보였다는 말씀이세요?

◆ 김용화> 그때 당시에 한 50대로 본 거예요.

◇ 김양원> 그 정도로 고생을 많이 하고 살았군요. 그렇게 어려움 속에서 사는 한 모 씨를 남한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우리 회장님께서. 그런데 어렵게, 어렵게,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까지 왔는데, 와서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 하고 이렇게 숨진 채 발견이 된 건데요. 발견 당시에 한 모 씨 집에서 먹을거리가 하나도 없었고, 고춧가루와 빈 간장통, 그리고 잔고가 0원인 통장 세 개가 남아 있었다고 언론에서 보도했습니다. 이 사건을 취재한 기자의 취재수첩을 제가 읽었는데, 마지막 잔고가 3858원. 그런데 이 3858원까지도 인출을 했더라. 그 정도로 경제적으로 극한으로 몰렸던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 김용화> 그런데 이게 중국에서 이혼을 하고 와서 올 때는 남편하고 이혼을 했으니까 그냥 쫓기다시피. 중국에서 돈을 가지고 나온 것도 아니고, 한국에 와 봤자 누가 용돈 줄 사람도 없는 거고, 나와서 저한테 처음에 전화가 와서 이혼을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되냐고 해서 저도 몰랐습니다. 그때 모자라고 해도 다 혜택을 받는다고 생각을 안 했지만, 애가 뇌전증이 있기 때문에 병원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어린이집에서는 뇌전증 환자를 안 받아준다고 하더라고요.

◇ 김양원> 뇌전증이 있다 보니까 어린이집에도 보낼 수 없는 상황이었군요.

◆ 김용화> 그렇죠. 그래서 처음에는 그 애를 어린이집에 보내면 안 되느냐? 하니까 애가 많이 아프다. 방법이 없더라고요.

◇ 김양원> 그러니까 애를 놔두고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도 없었고.

◆ 김용화> 처음에는 제가 애를 집에 가둬두고 한두 시간씩 아르바이트라도 하라고. 그런데 애가 한 번 쓰러졌기 때문에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하고. 그래서 저한테 연락이 왔을 때 판단을 너무 쉽게 한 게 동사무소에 가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면 된다고, 100%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한참 있다가 다시 동사무소에서 전화가 온 게 확인서를 요구한다. 중국에서 이혼한 확인서. 그리고 또 하나는 엄마의 건강. 엄마가 건강하기 때문에 수급자 대상이 안 되기 때문에 엄마가 일을 못 하면 진단서도 요구한다. 그래가지고 일단 알았다고 전화를 끊고 관악구청 복지팀에 전화를 했습니다.

◇ 김양원> 회장님께서 직접이요?

◆ 김용화> 네. 왜 그러냐 하면 첫 마디가 법대로 한다고 해서 제가 법도 사람이 있어야 법이 있을 거 아니냐, 일단 접수를 해서 바쁜 것은 구제를 해놓고 보자고 하니까 서류를 가지고 오면 자기들이 안 받아줄 이유가 없다고 하기 때문에.

◇ 김양원> 제대로 된 제도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한 씨가 딱하셔서 대신에 구청에도 전화를 해보고, 또 같이 싸워도 보시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군요.

◆ 김용화> 그런데 제가 제일 마음이 아픈 건 한 씨는 탈북자 단체나 이런 곳에 크게 접촉을 안 해봤기 때문에 제가 단체 일을 하다 보니까 북한식 생각해서 단체장이면 힘도 조금 있고, 공신력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안 된다고 하니까 그다음에 더 포기를 하지 않았을까. 포기해서 절망해서 이런 비극을 만들지 않았나. 저는 거기서 항상 지금도 자책감을 받는 거예요.

◇ 김양원> 곁에서 지켜보셨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회장님을 최후의 보루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마저도 도움이 되지 못한 것들이 많이 자책이 된다, 이런 말씀이신 것 같은데요. 저희가 석 달이나 지나서 이렇게 한 씨 모자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당시에 한 모 씨 사망이 던져준 충격이 우리 사회에 상당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알기로는 한 씨 모자는 한 부모 가정이었고, 더군다나 일정한 소득이 없는 상황, 탈북민이었잖아요. 다른 것을 다 떠나서 탈북민들의 경우에 일정 기간 우리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지 않습니까?

◆ 김용화> 통일부에서 기준은 탈북자가 들어오면 6개월 동안 정착 기간을 준다고 하는데, 6개월이 지나면 생계비도 자르고, 의료보험도 자르고. 그때부터 무조건 나가서 일을 하라고 하는데요. 구청에서 요구하는 건 일을 할 수 없다는 그런 진단서를 떼라고 하는데, 제가 경찰, 병원에 찾아가서 이야기를 하니까 대한민국에 그런 진단서는 없다. 진단을 뗀다는 것은 그냥 그 병명을 가지고 판단해야지, 그런 진단은 줄 수 없다. 아픈 분은 병원에서 판단하는 게 정답이 아닐까. 통일부에서 일방적으로 이거는 아직까지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 분들이 그래도 중국에 있을 때 조선족들하고 결혼해서 그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고, 거기에 또 자기 목숨 같은 자식도 있고, 그러면 남편들을 데려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적 신청하는 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항상 이 사람들은 5년 이상, 심지어 7년, 8년 있다가 하는데, 대부분 5년 이상 되면 이혼을 해버리더라고요. 견디지를 못해서.

◇ 김양원> 중국인 동포랑 결혼한 탈북민의 경우에 아내나 남편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까지 5년 이상이 걸리고, 그러다보니 그 기간 동안에 누적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결국에는 이혼하게 되더라.

◆ 김용화> 그렇죠. 그런데 이것을 과연 그 사람들이 들어와서 영주권 정도. 애를 낳고 산다는 사람들. 다 그렇다고는 볼 수 없지만, 애도 낳고, 잘사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동사무소도 복지팀이라는 게 있으니까 가서 확인을 해보면 영주권이라도 있으면 이 사람들이 회사 취업이라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결국, 이 사람들이 더 막다른 골목으로, 결혼 자체가 행복으로 끝나야 하는데, 그쪽이 아닌 비극으로 끝나는. 저는 그렇게 봅니다. 대한민국은 법이 앞에 있지, 탈북민이 앞에 있다고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 김양원> 현장에서 겪어 오신 설움, 이런 것들이 굉장히 크신 것 같은데요. 제가 듣기로는 우리나라에 정착한 탈북민의 수가 3만 3000여 명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분들을 관리하고 도움을 제공하는 곳이 있지 않나요?

◆ 김용화> 통일부 정착지원과는 저는 뭘 하는 장소인지 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남북 하나재단. 그런데 탈북자들은 과연 남북 하나재단이라고 할 때 체육대회나 하고, 이게 전부라고 알지 거기서 어떤 혜택, 그것도 기준이 있기 때문에 5년 지나면 안 되고, 7년 지나면 안 되고, 이런 기준은 일반 탈북자들로서는 알 수도 없고, 그러니까 하나재단은 북한말로 하게 되면 양반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저는 평가를 하고 싶지 때문에 하나재단이 새롭게 나려면 정말 제일 밑에서 살겠다고 애쓰는 탈북민들하고 하나가 될 때 변화가 있지, 지금처럼 성공한 탈북자만 자꾸 내세우려고 하는데요. 성공보다 성공을 하려고 노력하는 탈북자들, 그리고 모르는 탈북자들한테 희망을 주는 장소가 남북 하나재단이나 통일부 정착지원과가 됐으면 좋겠다. 정말 이것은 간절한 소원입니다.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물론 정부가 예산도 있고, 또 탈북자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부에 손만 내밀고, 안 좋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탈북자도 가족으로 생각해 봐라.

◇ 김양원> 탈북민도 사람이다. 어떤 제도나 법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노력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요. 좋은 말씀이신 것 같고요. 오늘 말씀은 저희가 시간상 여기까지 들어야 할 것 같아요.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김용화> 네, 감사합니다.

◇ 김양원> 지금까지 탈북난민인권연합 김용화 회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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