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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수)

“금융위기 때도 기술·혁신 기업 투자 안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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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조선]
토종 기업에 연 400억원 투자
세계 39곳에 사무소 두고
회원사의 해외 진출도 도와

조선일보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아일랜드 기업진흥청 전경. / EI 한국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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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기업진흥청(EI)은 아일랜드의 유망한 토종 기업을 육성하고 이들의 외국 진출을 지원하는 정부 기관이다. 다국적 기업을 아일랜드로 유치해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 그 이상을 해보자는 취지로 출범했다. 해외 투자를 아일랜드로 유치하는 기관이었던 아일랜드 투자발전청(IDA)에서 1998년 토종 기업 지원 기능을 분리해 만든 조직이다. 매년 3100만유로(약 410억원)를 토종 기업에 투자한다.

EI 회원사는 5000곳이다. 작년 회원사 수출액 합계는 238억유로(약 31조3705억원)였다. 고용 인력은 총 25만 명이다. EI 회원사 수출액은 10년 전보다 110억유로(약 14조5000억원) 증가했다. 세계 각국의 39개 EI 사무소는 현지 사정에 능통한 인력을 채용해 아일랜드 기업의 해외 진출을 적극 지원한다. 10월 말 한국에 진출하는 아일랜드의 공기청정살균기 제조 회사 ‘노바이러스(Novaerus)’도 엄태원 EI 한국 대표에게 도움을 받았다. 엄 대표로부터 수입 가전 유통 회사 ‘게이트비젼’을 소개받은 것이다. 게이트비젼은 영국의 프리미엄 가전 브랜드 ‘다이슨’을 한국에 들여와 크게 성공시킨 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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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비 오는 월요일에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EI 본부를 찾았다. 이곳에서 △EI가 주목하는 신흥성장 시장인 아시아·태평양을 담당하는 톰 쿠삭(Tom Cusack) 지역 디렉터 △아일랜드 경제의 핵심 분야인 생명과학 산업을 총괄하는 디어드레 글렌(Deirdre Glenn) 디렉터 △유망한 토종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HPSU(High Potential Start Up) 부서를 맡은 앨런 홉스(Alan Hobbs) 매니저 등 3명을 만났다.

맡은 분야는 다르지만 아일랜드 토종 기업 육성의 중요성을 논할 때는 세 사람 모두 목소리를 높이고 눈을 반짝였다. 세 사람을 각각 1시간씩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이를 대담 형식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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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 유럽서 두 번째로 큰 시드 기관 투자자

다국적 기업 중심으로 성장한 아일랜드 경제에서 토종 기업이 중요한 이유는.
글렌 "다국적 기업은 토종 기업 성장의 씨앗이고, 이 씨앗에서 토종 기업이 꽃을 피웠다. 꽃이 피게 하는 데 EI 등 정부의 노력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1970~80년대 다국적 제약·바이오 기업의 아일랜드 유입 이후 협력업체로서 토종 기업이 성장했다. 특히 지난 10년간 다국적 기업의 신제품 개발 파트너 또는 전략적 파트너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다 2000년대 이후에는 친기업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정부는 유망한 토종 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 시작했다. 당시 재정도 꽤 괜찮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투자금을 많이 풀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때 아일랜드 경제는 구제금융을 받아야 할 정도로 무너졌다. 하지만 아일랜드 정부는 이런 어려움에도 과학 기술과 혁신 기업 투자 예산은 절대 줄이지 않았다. 혁신 기업에 대한 투자를 줄이면 토종 기술 산업의 발전이 멈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는 작은 나라다. 발전이 멈추면 살아남을 수 없다. 정부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EI 회원사 가운데 생명과학 분야의 기업은 몇 곳인가.
글렌 "EI 회원사 중 생명과학 기업은 약 270곳이다. 이 중 80%는 직원이 50명 미만인 중소기업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일랜드 토종 기업은 이렇게 작은 곳밖에 없나?’ 하는 의문이 들 거다. 토종 기업의 규모가 좀 커지면, 아일랜드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이 대부분 인수해 버리기 때문에 그렇다."
홉스 "다국적 기업이 토종 기업을 인수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인수된 토종 기업이 새로운 성장 기회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노믹스메디슨아일랜드(GMI)라는 촉망받는 토종 기업이 있었는데, 중국의 우시바이오로직스 계열사에 인수됐다. 이 회사는 작년 11월 4억달러(약 5300억원) 규모의 투자를 받아 유전자 관련 연구를 주도하게 됐다. 이 연구에서 창출된 일자리만 600개다. 다만 토종 기업이 사업을 조금 더 키운 다음에 매각을 추진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다. 너무 일찍 회사를 파는 바람에 제값을 못 받는 경우를 종종 봤기 때문이다."

EI는 토종 기업 육성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
쿠삭 "유망 기업에 자금을 투자한다. EI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시드’ 기관 투자가다. EI는 기업의 지분 일부를 취득해 주주가 된다. 보유 주식은 10%를 넘지 않도록 한다. EI는 지분을 가졌다고 해서 경영에 참견하거나 이사회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지 않는다. 경영은 전적으로 기업 자율에 맡긴다."
글렌 "EI는 기업·대학의 연구에도 투자한다. 만약 상업화할 만한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이 있을 경우, EI는 그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도록 비용을 댄다. 이를 EI의 ‘상업화 펀드(Commercialisation Fund)’라고 한다. EI가 회원사의 현황을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상업화 펀드의 투자를 받고 싶은 기업은 EI 전문 심사역의 평가를 거쳐야 한다. 연구가 규제를 준수하는지, 이미 출시된 비슷한 제품과 비교했을 때 경쟁력이 있는지 등을 따진다. 매년 60~70개 정도의 제품이 상업화 펀드의 지원을 받아 시장에 나온다. 이외에도 스타트업이 새로운 투자 유치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국내외 벤처캐피털을 소개하기도 한다. EI는 토종 기업의 ‘사업 멘토’다."

한국은 서울에 기업들이 집중돼 있다. 아일랜드는 어떤가.
글렌 "아일랜드는 그렇지 않다. EI 회원사의 70%가 수도 더블린이 아닌 지역에 있다. 국토 전반에 고루 분포해 있는 것이다. 지역마다 산업군별 ‘클러스터(단지)’가 조성돼 있다. 아일랜드 서부의 골웨이에는 의료 기술 클러스터, 남부의 코크에는 의약품 제조 클러스터가 조성돼 있다. 더블린에는 디지털 헬스와 제약 서비스 산업이 발달했다."
홉스 "EI는 클러스터별로 맞춤형 지원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가령 의료 기술 산업이 발전한 골웨이 지역의 EI 사무소는 ‘바이오이노베이트(BioInnovate)’ 장학·연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의료 기기 관련 창업 희망자를 위한 10개월짜리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참가자에게 첫 3개월 동안은 수술실이나 치료실 같은 곳을 집중적으로 보도록 한다. 의료 현장을 아주 가까이서 파악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창업 아이디어가 떠오른 사람은 EI에 투자를 요청할 수 있다. 아이디어가 시장성이 보이면 상업화 펀드가 지원한다. 상업화 펀드 지원 대상이 되면 2~3년 정도 대학에서 지원받으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험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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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 야망 키워주는 프로그램 운영

그 외 EI만의 독특한 기업 지원 제도가 있다면.
쿠삭 "기업가 ‘야망(ambition)’을 키워주는 경영 수업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싶다. ‘성장을 위한 리더십(Leadership 4 Growth)’이라는 프로그램인데 12년 전 시작했다. 미국 스탠퍼드대와 협약을 맺어 만든 프로그램이다. 우리 회원사 중 규모가 큰 곳을 위주로 이 프로그램에 CEO를 참여시킨다. CEO가 ‘우리 회사도 연 매출 5억유로(약 6600억원) 규모까지 충분히 성장할 수 있을 텐데?’ 하고 야망을 갖도록 견문을 넓혀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CEO들이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내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참가한 CEO들은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에서 일하는 인재들과 만날 기회를 갖는다. 실리콘밸리에는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가 많다. 이런 사례가 아일랜드 토종 기업인에게 경영의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다. 이 프로그램을 수료한 CEO가 경영으로 복귀한 뒤에 이전보다 훨씬 큰 그림을 그리는 경우를 많이 봤다. 이제는 스페인, 스위스, 미국 동부 지역 등에서도 CEO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참가비는 5만3300유로(약 7000만원)인데, 이 중 기업은 2만1300유로(약 2800만원)만 부담하고 나머지는 EI가 지원한다."

정부 기관이 돈을 들여 기업가의 야망을 키워주는 것이 신기하다.
쿠삭 "기업가의 야망이 커지면, 그것이 곧 아일랜드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부 기관 중에는 EI가 세계 최초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았을까. 스탠퍼드대는 이제 이 프로그램을 다른 나라에도 판매한다. CEO 대상 프로그램이 성과를 거두면서 최고재무책임자(CFO) 과정도 만들었다. 우리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아일랜드 토종 기업이 세계 무대로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가족 경영 기업의 CEO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규모가 큰 회원사 가운데 여전히 가족 경영인 기업이 많다. 그런데 가족 경영 기업의 CEO들은 대부분 ‘이 정도면 괜찮지’ 하고 현재에 만족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듣고 난 가족 경영 기업 CEO 상당수가 ‘우리 회사가 더 성장하려면 전문 경영인이 필요하지 않을까’ ‘내가 물러나면 회사가 더 잘될까’ 등의 고민을 했다고 한다.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동안 CEO들은 ‘당신은 5년 후 회사 규모를 두 배로 성장시킬 수 있습니까’와 같은 기업의 성장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받기 때문이다."

(쿠삭 아시아·태평양 지역 디렉터에게) 아시아·태평양은 EI에 어떤 존재인가.
쿠삭 "새로운 시장, 성장하는 시장이다. 현재 아시아·태평양에 진출한 아일랜드 회사는 작년 기준 600여 곳이었다. 작년 아·태 지역 수출액은 20억유로(약 2조3600억원)로 EI 회원사 수출액의 9%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중국 수출액 비중이 절반이다. EI는 아일랜드 기업에 아·태 지역에서 사업하기 위해 알아야 할 문화·제도적 차이 등의 정보까지 챙겨준다. 그 외 가장 큰 수출 시장은 영국으로, 33%였다. 그다음이 유로존(2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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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아 이코노미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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