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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수)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85] 초록은 조금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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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초록은 조금 남아 여름내풀물든한지창에도초록은조금남아스무나무빈둥지에고이는늦은밤별빛에도초록은조금남아마른개지꽃아슬한먼해안미역냄새에도초록은조금남아능이국끓이는마가리들메나무열매에도초록은조금남아접도구역우두커니혼자매여있는흰염소똥에도초록은조금남아주인없는청배나무잎사귀뒤에숨은자벌레등허리에도초록은조금남아

―유재영(1948~)

초록의 계절은 이제 다 지나갔습니다. 사람 일생으로 치면 노경(老境)입니다. 산골짜기의 가을 물은 풍성하고 맑습니다. 겨울을 대비하느라 산도 머금었던 물기를 뱉어내느라 그러하답니다. 거기 잔잔히 일어나는 물결을 일러 추파(秋波)라고 한다는데 그 추파의 이편에 앉아 참으로 오래 잃어버렸던 웃음 한 움큼 되찾고 싶은 가을날입니다.

지난 초록의 날들 아쉬워 여기저기 찾아봅니다. 산(마가리)이니 바다(미역)니 도처에 초록입니다. 한지(韓紙) 창 밖은 여름내 숲이 무성했으니 아직 그 잔상이 어른거립니다. 잠 오지 않는 늦은 밤하늘의 흐린 별에도 초록은 글썽입니다. 거기 옮겨 숨겨두었던 젊은 날의 사랑도 그대로 초록입니다. ‘접도 구역’ 비탈에 ‘혼자 매여 있는 흰 염소’는 고독의 초상입니다. 그의 고독한 배설물 속에도 초록은 조금 남았습니다. ‘주인없는청배나무’ 찾아가 말하고 싶습니다. 초록 다 지나면 깨끗한 겨울의 올곧은 모습이 오리니 그것이 순방향 아니겠는가! 우리네 역사도 그러하지 않던가!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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