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감정
마사 누스바움 지음·박용준 옮김
글항아리 | 684쪽 | 3만2000원
마사 누스바움의 <정치적 감정>은 자유주의 정치사회가 개인들에 의해 형성돼가는 과정에서 적절한 공적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초점을 둔다. 정의로운 사회의 핵심가치를 인간의 생명, 건강, 교육, 정치적 권리와 자유, 환경 등에 둔다면, 이러한 인간발전을 위해 정치사회는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지 않으면 안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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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법과 제도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감정적 지지를 요구”
‘정의’와 ‘사랑’의 결합을 통한
자유주의 정치사회 형성 과정에
개인들 ‘공적 감정’ 중요성 강조
“자기중심적 편견의 위험들은
법규와 비판으로 계속 점검해야”
지금의 한국사회에 메시지 던져
마사 누스바움. 글항아리 제공 |
마사 누스바움은 이성의 영역으로 여겨져온 법과 정치에서 ‘감정’의 중요성을 설득해온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이다. <정치적 감정>은 그가 연구해온 감정이론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를 옹호하고, 인간성의 발전과 역량접근(capability approach)이론을 결합한 탁월한 저서이다. 이 책은 정의라는 보편성과 사랑이라는 특수성의 결합을 통해 자유주의 정치사회가 개인들에 의해 형성돼 가는 과정에서 적절한 공적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초점을 둔다. 정의로운 사회의 핵심가치를 인간의 생명, 건강, 교육, 정치적 권리와 자유, 환경 등에 둔다면, 이러한 인간 발전을 위해 정치사회는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지 않으면 안된다.
누스바움의 책들은 동물적인 인간의 취약함과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동시에 생각하도록 한다. 현대사회에서 법적 실천과 판단의 영역들은 우리 삶과 너무도 밀접히 연관돼 어쩌면 인간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가를 가리키는 나침반과 같은 구실을 한다. 그래서 그 나침반이 고장 나게 되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삶의 도상(途上)에서 방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누스바움의 책들이 주는 교훈은 귀중하다. “무엇이 법인지”를 찾고 실천하는 공무원들이 보여주는 나침반의 숫자가 진짜 법인지, 아니면 법조문의 글자인지, 아니면 그들의 ‘감정(emotion)’인지. 누스바움의 이 책은 정치적 감정을 해부하고 정치적으로 타당한 감정만이 정의를 정당화하고, 그래서 그 사회가 정의를 향한 도상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게 한다.
누스바움은 미국 시카고대 로스쿨의 법철학 교수이다. 그는 현대 정의론의 대가인 롤스(J. Rawls)의 제자로서 법과 정치 이외에도 문학과 철학, 심리학, 인류학, 여성학, 교육학, 영장류학과 음악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법의 사상적 지평을 넓혀 왔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적 토대가 굳건히 유지되기 위해서는 인간성(humanity)의 함양, 특히 공감(compassion, 동정심·온정·연민으로도 번역)의 도덕적 토대 형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다방면에 걸쳐 깊고 넓다. 대표적인 저서 몇 개만 보더라도 그가 주장하려는 바를 금방 가늠할 수 있다. <사랑의 인식>(1990), <시적 정의>(1995),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1996), <인간성 수업>(1997), <선의 취약성>(2001), <감정의 격동>(2001), <혐오와 수치심>(2004), <역량의 창조>(2011), <분노와 용서>(2016) 등. <정치적 감정>은 2013년 출간됐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적 성숙기에 만개된 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로크(J. Locke)에서 롤스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 역사의 문제점은 정치적으로 타당한 친사회적 감정들(사랑, 애국심, 관용)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는 데 있다. 그는 루소의 ‘시민적 종교’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앙시앵 레짐이 평등과 박애로 대체되는 것에서, 그리고 밀(J. S. Mill)과 타고르의 인류종교(religion of humanity or man)에서 사랑과 공감의 확장을 위한 새로운 동력을 찾으려고 한다.
사실 ‘앙시앵 레짐이냐, 새로운 질서로의 도약이냐’는 우리의 현실적 문제이기도 하다. 실제 롤스 이외에도 로널드 드워킨(R. Dworkin)과 같은 법철학자의 연구는 자유와 평등 이외에도 박애의 공동체를 법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모색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누스바움처럼 자유주의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감정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적극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누스바움은 이미 “법과 제도 안에 선한 감정들의 통찰이 구현되고 있다”고 본다. 복지제도는 공감과 연민이 없으면 법적 제도화가 어려운 부분이다. “좋은 법과 제도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감정적 지지를 요구하며, 사회를 좀먹는 나쁜 감정의 영향으로부터 보호될 필요가 있다.”(219쪽) 그런 점에서 그는 현대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은 편협한 공감능력에 의거한다고 본다.
물론 누스바움의 문제의식에도 한계는 있다. ‘어떻게 이 선한 감정들이 전체주의로 빠지지 않고 법적으로 실천될 수 있는지.’ 이에 대해 그는 여러 곳에서 공적 감정을 함양하는 방안이 어떤 ‘포괄적 이론’이 돼서는 안된다고 언급한다. 그는 공적 감정이 자유주의적 자유를 증진하는 하나의 예로 애국심을 든다. 링컨, 마틴 루서 킹, 간디, 네루 등의 애국심이 그 예들이다. 이들의 애국심은 혐오와 같은 배제적 감정의 표출이나 강요된 양심, 무비판적 동질성에 기초해 있지 않았다. 혐오로 인한 집단적 분리는 현대사회가 앓는 질병이다. 타자를 인간 이하로 보거나 타인을 이익이나 정치권력을 위한 도구로 인식하는 나르시시즘은 인간 부정에 이르는 것이다. 낙인찍기는 애국심의 표현이 아니다. 상상력과 사랑만이 정치적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힘이다(제8장).
칸트는 그 연관성을 거부하지만 누스바움은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 나온 인간의 근본악을 인간의 동물성 탓으로 본다. 누스바움은 조심스럽게 동물성에 대한 혐오가 우리의 오래된 감정에 남아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사회정의를 실현시키려면 인간의 자기혐오 뿌리를 다뤄야 한다고 본다.
동물들은 우리 자신들의 징표들이다. 오히려 누스바움은 인간과 동물이 갖는 명백한 유사성을 혐오가 아니라 공감에서 찾는다. 혐오란 전염될 수 있다는 인간 취약함의 징표들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누스바움은 인지주의적 감정이론을 끌어들인다.
즉 ‘감정이 알아채고(인지하고) 감정이 판단한다’. 인간의 감정은 판단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주의적 판단을 요청한다. 공감할 수 있다면 고통받는 한 개인이나 여럿이 나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상상력을 가진다. 그들이 내 삶의 기획과 목표 안에 포함된 사람들이라는 상상력을 통해 나의 행복은 그들을 배제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을 때 가능하다. 타인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혐오와는 다르지만 공감을 위태롭게 하는 공감의 적들이 있다. 두려움, 시기심, 수치심이 그것이다. 올바른 정치 지도자라면 이러한 적대적 감정을 이용할 것이 아니라 동료의식을 심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9장·10장).
누스바움은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해, 한나 아렌트의 견해를 반박한다. 즉 법을 통과시키기 이전에 인종 간의 조화가 먼저라는 주장은 잘못된 의견이라는 것이다. 법과 제도는 나쁜 시민적 감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 좋은 법의 감정적 결과에 대한 연구는 아니지만, 이 책은 대중의 감정적 기류가 좋은 법 제정에 영향을 미치는 점을 밝히고 싶어 한다(492쪽).
누스바움은 이 저서의 목적이 롤스가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미뤄 두었던 합당한 심리학을 개진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28쪽). 즉 사회적 안정성은 “정당한 이유들”을 토대로 확보돼야 하는데 감정이 그런 역할을 한다고 본다. 감정 안에는 뼈와 살의 관계처럼 정의에 대한 관념이 내포돼 있다(32쪽). 누스바움은 자유주의 법과 정치에 스며 있는 감정의 지형을 찾고 그것을 올바르게 파악하면 편협한 공감능력을 갖고 있는 시민사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사랑의 규범적 구성요소 중 하나를 공감에서 찾는다.
이 책이 지금 한국 사회에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자기중심적 감정에 내재하는 편견의 위험들은 법규를 통해, 또 강력한 비판적 문화를 통해 계속 점검”돼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중문화는 대중들의 감정을 유도한다. 그런 점에서 공적 예술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 그러나 “강요하지 말고 초대하라” “비판하라”. 그 비판은 타자를 낙인찍는 비판이 아니라 “바로 그가 나였다”는 것을 아는 반성적 비판이 돼야 사랑이 된다. 인간의 취약함과 고귀함이 근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자유주의는 신이 생략된 채 ‘사랑’의 언어를 박애의 정신으로, 그리고 시민종교로 다시 재정립하고자 했다. 누스바움이 재정립하고자 한 그 인간종교의 현대 경전이 바로 ‘헌법’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는 우리 모두가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신’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김연미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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