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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시선]‘섹드립’을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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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했던 연예인을 한 명 잃었다. 머리 색부터 입는 옷까지 그 사람의 패션과 분위기가 좋았고, 때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 해줘서 좋았다. 내가 노브라에 대해 백 번 말해도 전달이 잘 안되는데 셀럽의 힘으로 한 번 이야기를 해주면 그다음 날은 온통 사람들이 노브라 이야기를 하는 것도 기뻤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트집을 잡을 때도 기죽지 않는 것 같아 그 의연함이 대단하다 싶었는데 사실 속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다시는 설리의 그 싱그러운 미소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예상치 못했던 설리와의 작별 이후 비록 오랜 팬이었지만, 또 다른 연예인 한 명을 내 마음에서 떠나보내기로 했다. 나는 이제 그 남자 연예인의 이름이 싫어졌다.

경향신문

나이가 같아서 그랬을까 유독 그가 내뱉는 랩들이 늘 마음에 콕콕 들어왔다. 오늘 밤 같이 놀자는 흥겨운 노래에도, 이제 곧 서른이라 하루를 밤새우면 이틀은 죽을 것 같다는 엄살에도 늘 깊이 공감하여 그의 곡들을 플레이리스트에 올려두었다. 앨범을 사고 콘서트에도 가고 신나는 일이 있거나 음악의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종종 그의 노래를 들었다. 처음 그의 예명에 대한 뜻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냥 피식 웃으며 귀여운 허세쯤으로 넘겼었다. 고백하건대 혈기 넘치고 짓궂은 남자애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그때 내 수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성한다.

그는 이름의 뜻은 알아서 검색해보라며 지상파며 케이블 TV에 나와 개그의 소재로 활용했고 동료 역시 진짜 대단하다며 맞장구를 치며 비슷한 얘기를 반복해왔다. 내가 그랬듯 많은 이들이 웃음으로 받아들였고 수위 높은 이 농담을 그저 유명 래퍼의 패기쯤으로 이해해왔다. 이런 허세와 섹드립이 농담으로써 가능한 이유는 남성들 간의 과시문화를 사회가 그동안 용인하고 또 때때로 부추겼기 때문이다. 물리적 힘이나 사회적 신분, 특히 성적 능력이 뛰어난 이를 진짜 남자, 강한 남자의 모델로 심어두고, 내가 바로 그 남자다라고 증명하는 사람에게 사회는 환호로 답했기 때문이다. 상남자라고 포장되고 칭송받는 캐릭터를 생각해보라. 자신의 남성적인 면을 과시하고 이를 통해 서로를 남성으로 인정해가는 동료 문화는 역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과 항상 닿아 있다. 남성성을 획득하고 동료의 지지를 얻는 과정이 ‘여성적인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이를 거부해야 하는 것이라면 이 과정에서 여성이 어떤 식으로 대접받을지 우리는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집단 성범죄의 온상이었던 카톡방에 대해 ‘친구들끼리 허세 부린 것뿐’이라는 승리의 말이 여기서 연결된다. 누군가에겐 그저 드립이고 놀이였다고 할지 몰라도 반대편의 누군가는 대상화된 놀잇감이 되고 피해자가 되었다. 남자들이 스스로를 섹스의 심벌로 삼을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이를 문화적 코드로 소비할 때, 그 놀이는 원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제물로 이용했다.

그녀가 고인이 되었다는 공식 기사에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성적 드립이 난무했다. 수많은 보통 사람들처럼 그녀도 그저 연애를 하고 그러다 헤어졌을 뿐이지만 상상 이상의 사이버성폭력이 시작됐던 그 지점도 그의 예명이 연결고리가 되었다. 사랑받는 걸그룹 막내에서 순식간에 표적이 되어버린 그녀는 많이 강해 보였지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런 몸을 가졌지’라고 자랑하는 남자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 ‘너희들의 놀이를 위해 나를 가지고 놀아도 돼’를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가 의도한 바도 아니었을 테고, 오래 사용한 예명이 이런 파장을 가지고 올지 몰랐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성희롱 댓글을 단 이들과 이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조회수 올리기에 여념이 없던 언론이 가장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2, 제3의 피해자를 막으려면 막연히 그저 ‘악플은 이제 그만’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성폭력과 섹드립이 놀이가 된 문화를 다시 한번 짚어보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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