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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정재욱의 이슈Law]피의사실 공표, 인권과 수사외압의 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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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욱 법무법인 주원 파트너변호사] “계약체결 대가 거액 주고받은 주택조합장 구속”, “학생들이 낸 보증금으로 카지노·호화생활 ** 원룸 사기범 구속”, “여성 장애인 성추행 콜택시 운전사 구속”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건이 발생하면 관련자가 구속됐다는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그 이후에 그 사람이 실제 형사 공판에서 유죄를 받았는지, 아니면 무죄로 풀려났는지 알려주는 기사는 정치인이나 주요 재벌 사건이 아닌 이상 찾아보기 쉽지 않다. 피의자가 구속된다는 것은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는 것이지 죄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또한 검찰에서 기소(공소 제기)한다는 것은 법원에 심판을 구한다는 것일 뿐 죄를 확정했다는 건 아니다.

이데일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누군가 구속되거나 기소되면 이미 그 사람의 죄가 확정된 것처럼 범죄자로 낙인 찍는 경향이 있다. 헌법 제27조 제4항의 무죄추정원칙에도 불구하고 실제 관행과 통계상으로는 구속이나 기소가 되면 유죄가 추정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해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형사재판에서 무죄가 나올 확률이 1~2% 내외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혀 근거 없는 관행이라 보긴 어렵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형사재판에서 적용법조나 형량이 변경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자주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 무죄가 나오는 경우도 상당수 있기 때문에 엄밀히 보면 이는 잘못된 관행이라 볼 수 있다. 심지어 구속돼 재판 받다가 무죄를 받는 경우도 있는데 최근 대법원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지난 10년간(2009~2018년) 구속상태로 재판을 받은 피고인 중 1827명(0.6%)이 무죄 판결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비중은 낮지만 숫자로는 상당한 수치라 할 수 있다. 심지어 기소되기도 전에 수사 브리핑, 중간수사결과 발표 등을 통해 피의자의 각종 혐의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피의사실 공표는 피의자의 형사 방어권은 물론 인격권, 명예 또한 심대하게 침해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가족에 대한 수사, 장기 미제로 남아 있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 지목, 고유정 살인사건 논란 등이 한국 사회를 휩쓸고 가면서 피의사실 공표 논란은 점차 커지고 있다. 논란에 대한 결론은 피의사실 공표를 엄격히 금지하는 것으로 모아지고 있다. 그 방향성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제도 개편에 따른 혜택은 고위 공직자, 정치인, 재벌들에게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피의사실 공표로 인한 인권 침해는 문제

다투고 있는 사항들이 마치 사실로 확정된 것 마냥 언론에 보도되고 개인의 인적사항까지 유출돼 주변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경우가 있다. 정식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것도 피의자 입장에서는 큰 부담으로 작용하지만, 수사 관계자가 조금씩 제한적으로 정보를 유출할 때 더 큰 곤란에 빠지게 된다. 수사기관에서 어떠한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언론에 보도되고 각종 전문가 패널들의 추측성 발언이 여과 없이 이어진다. 단순 교통사고임에도 불구하고 보험사기 가능성도 있다고 언급되거나 아무런 접촉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범죄자로 낙인 찍혀 사회적 단죄가 내려지기도 한다. 아직 수사가 종결되지 않은, 즉 수사를 당하는 피의자 입장에서는 잘못된 정보가 언론에 보도된다고 하더라도 쉽게 대처하기 어려운데 섣불리 대응하다간 여론의 뭇매를 맞음은 물론 향후 수사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명무실한 피의사실 공표죄

이 같은 수사보도로 인한 피의자의 인권, 인격권, 명예 침해 방지를 위해 피의사실 공표죄(형법 제126조)가 지난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부터 도입됐지만 실질적인 역할과 기능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법 규정상으로는 `검찰, 경찰 기타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 청구 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돼 있다(형법 제126조). 문언 그대로 해석하면 검사의 기소 전에 이뤄지는 모든 수사결과 발표나 공식 브리핑은 위 법 조항에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경찰 수사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수사 브리핑은 모두 법 위반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통계를 살펴보면 피의사실 공표죄는 사실상 없는 죄나 마찬가지인데 법무부 검찰 과거사 위원회에서 지난 5월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08년부터 2018년까지 피의사실 공표죄로 접수된 347건 중 기소된 건은 단 한 건도 없다. 불기소처분이 난 것은 무려 243건이며 나머지 104건은 기소중지, 이송, 미제 등으로 처리된 것으로 파악된다. 결국 현재 형법 제126조의 피의사실 공표죄는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자` 정도의 선언적 조항으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 현실적 규범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못하고 있다.

살아있는 정치, 경제 권력에 면죄부 될수도

기본적으로는 무죄추정원칙, 피의자의 인권, 명예 등을 감안하면 위와 같이 유명무실화된 피의사실 공표금지를 현실화 할 필요가 있다. 다만, 피의자의 신분이나 범죄의 경중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피의사실 공표를 금지하는 방향으로만 제도를 개선하려 한다면 주요 정치인, 재벌들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최근 법무부는 피의사실 공표금지 실효성 강화 방안의 하나로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안)’을 발표했다. 이전 준칙에서는 범죄로 인한 피해 확산 또는 동종 범죄 발생이 심각하게 우려되는 경우, 공공의 안전과 관련하여 국민들이 즉시 알 필요가 있는 경우, 범인 검거나 중요 증거 발견을 위해 국민 협조가 필수적인 경우 등의 경우에는 공소제기 전이라도 예외적으로 수사사건의 내용을 공개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지만, 이번 개정안은 ‘사건관계인 또는 수사관계자의 명예와 인권을 침해하는 등의 중대한 오보가 실재해 신속하게 그 진상을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그 진위 여부를 밝히는 범위 내에서만 형사사건에 관한 정보를 공개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기존에는 고위 공직자, 정당 대표자 등 공적 인물이나 수사 사건 관련하여 언론에 실명이 공개되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실명을 공개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번 개정안은 예외적 실명 공개 조항을 완전히 삭제하였다. 피의사실 공표제한이라는 취지는 좋을지 모르나 이러한 개정안이 입법화 된다면 살아 있는 정치, 경제 권력에 대한 견제는 상당히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피의자의 방어권, 인권 등을 고려하면 일반 국민, 시민에 대한 검거실적을 홍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피의사실 공표를 적극 활용하는 것은 지양하고 금지해야겠지만 고위공직자, 재벌에 대한 수사가 여러 외압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울 때, 이들에 대한 피의사실 공표를 통한 국민여론으로 수사 탄력을 그나마 받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고려도 할 필요가 있다. 형사 판결은 찾아 보기 어렵지만 피의사실 공표로 인하여 피해를 본 사람들이 대한민국, 수사담당자, 언론사 등을 대상으로 손해배상청구를 한 사례는 있는데 대법원도 이에 대해 일반 국민들의 정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항에 관해 객관적이고도 충분한 증거나 자료를 바탕으로 한 사실 발표는 정당하다는 취지로 판시하고 있다(대법원 2001. 11. 30. 선고 2000다68474 판결). 결국 무조건적으로 피의사실 공표를 금지하기 보다는 약자의 위치에 놓여져 있는 일반 국민, 시민에 대한 형사사건 내지 범죄의 경중이 낮은 형사사건에 대한 피의사실 공표는 엄격히 제한하되 유력 정치인이나 재벌 그리고 중대한 범죄에서 범인 검거, 증거 확보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절차를 거쳐 피의사실 공표를 제한적으로나마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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