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압박 겪는 중년 남자 통해
회사의 본질 묻는 ‘9번의 일’
회유와 협박에도 버티지만
좌천을 거듭하며 망가지는 인격
“매일 출근하는 아버지 대단해”
9번의 일
김혜진 지음/한겨레출판·1만4000원
“오랫동안 그에게 회사는 시간을 나눠 가지고 추억과 기억을 공유한 분명한 어떤 실체에 가까웠다. 그의 하루이자 일상이었고 삶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친구이자 동료였고 가족이었으며 또 다른 자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일부이자 전부였던 것.”
회사 일이 밥벌이의 수단이자 자아 실현의 방편이며 사회적 기여와 인정의 근거가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행복하리라. 처음 회사의 일원이 되면서 많은 이들이 그런 행복을 꿈꿀 테지만, 실제로 그것을 누리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회사를 “자신의 일부이자 전부”라 여기고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회사 인간’이 설 자리는 갈수록 줄어든다. 무한경쟁과 효율을 내세운 회사가 그런 인간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혜진의 소설 <9번의 일>은 26년 동안 통신회사의 설치 기사로 일해 온 남자가 그렇게 회사로부터 내침을 당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느닷없이 ‘저성과자’로 분류되고 ‘교육 대상자’가 되었다가는 평생 해 온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업무를 떠맡거나, 더 나쁘게는, 아예 아무런 업무 지시도 받지 못하는 투명 인간 같은 처지로 내몰린다. 사실 회사는 그가 알아서 사직원을 내고 물러나 주기를 바라는 것인데, 그는 회사의 그런 의도를 모른 척한다. “회사에 대한 그의 마음은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다. 회사와 자신 사이에 무언가 오해가 생긴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자신과 회사의 관계가 예전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믿는 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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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것은 그릇된 판단이요 믿음이다. 회사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 <9번의 일>을 고전 비극의 틀에서 이해해 본다면, 이 소설의 비극성은 주인공 남자의 선의가 그가 기대했던 결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의 기대를 배반하고 사태를 점점 파국으로 몰아간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소설 뒷부분에서 그는 “나는 이 회사 직원이고 회사가 시키면 합니다. 뭐든 해요. 그게 잘못됐습니까?”라고 누군가에게 항변하는데, 잘못하지 않은 일이 결국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비극의 흔한 문법 중 하나다.
상품 판매, 수리 및 보수와 설치, 특별한 업무가 없는 ‘업무지원단’ 등을 거쳐 그가 마지막으로 배치된 곳은 궁벽진 시골의 통신탑 건설 현장이다. 그나마도 본사 소속이 아니라 하청업체 소속이고, 현장 업무가 끝나면 본사 소속으로 복귀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 사이에 그는 회사 동료였다가 5년 동안 업무지원단으로 내쳐진 끝에 아마도 분신 자살을 택한 종규의 장례식에 참가했고, 자구책의 일환으로 노조에도 가입한 터였다. 그때쯤 그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그만두었”고 “뭔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나 가능성마저 폐기”한 상태였다. 그곳에서 그는 “78구역 1조 9번”이라는 소속과 ‘이름’을 부여받는다. 소설 제목이 이에서 왔거니와, 아내와 아들, 친구 등 주변 인물들과 달리 주인공만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익명으로 처리된다는 사실은 한갓 도구와 부속에 지나지 않게 된 ‘회사 인간’의 본질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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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으로서 그가 하는 일은 주민들의 항의를 뚫고 통신탑을 세우는 일이다. 주민이래야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은 한 줌의 노인들뿐. 평생 살아 온 터전을 지키겠다고 움막을 짓고 몸에 사슬을 감거나 작업용 차량을 가로막으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주민들을 제압하는 과정에는 크고 작은 폭력이 수반되고 급기야는 인명 사고까지 나지만, ‘9번’은 그런 폭력에 점점 무감해져 간다. 본디 그는 특별히 착하거나 악한 사람이 아니고 대체로 평균적인 심성과 윤리의식의 소유자였는데,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아주 몹쓸 인간이 되었다.” “스스로의 바닥을 확인하고 매일 그것을 갱신해야만 가능해지는” 삶이 그에게서 인간다움이라는 덕목을 빼앗아간 것. 작가는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하고 상식적인 한 인간이 비인간에 가까운 어떤 괴물로 몰락해 가는 과정을 냉정하고 건조한 문체에 담아 펼쳐 보인다.
결말은 폭발과 파국이다. 파국은 사실 일찍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앞서 그가 누군가에게 “그게 잘못됐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것은 겉보기에는 자신이 잘못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남에게 확인시키는 다짐 같지만, 그의 내면을 좀 더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그것은 자신의 행동이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반성과 성찰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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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지시는 정당한 것이고 그 지시에 따르는 자신의 행동 역시 그릇될 리 없다는 확신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온 걸까”라는 후회는 “자신이 만든 것이 저토록 흉물스러운 것이었다는 깨달음”과 결합해 그를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끈다. 자신을 파괴하고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비극의 예정된 마무리다. 15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작가 김혜진은 “일이란 게 자신을 망가뜨리면서 지속시키는 것 같다”면서 “소설 마지막 장면은 꼭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회사는 소설가가 되기 전에 짧게 다녀봤을 뿐 경험이 많진 않지만, 지금도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는 아버지를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세대가 아니라 윗세대의 이야기라서 오늘날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합니다.”
김혜진은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소설집 <어비>와 장편 <중앙역> <딸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특히 2017년작인 <딸에 대하여>는 동성애자 딸과 엄마의 갈등과 화해를 그려 5만부가 팔리는 등 좋은 반응을 얻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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