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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토)

"영화가 수명을 3배 늘렸다"...대만영화 전성기 이끈 에드워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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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가의 사회-35] 에드워드 양 (영화감독, 1947~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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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감독이 된 컴퓨터 회사 직원

1970년대는 독일 영화 르네상스였다. 빔 벤더스, 베르너 헤어조크 등 젊은 서독 감독이 독일 영화 위상을 높였다. 베르너 헤어조크의 '아귀레, 신의 분노'(1972)는 여전히 독일 영화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1979)은 '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1970년대 미국에서 컴퓨터 회사에 다니던 에드워드 양의 인생도 바꿨다. 그는 '아귀레, 신의 분노'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버리기로 한다. 고국에 돌아가 영화에 뛰어든다.

1970년대 말, 동아시아에서는 홍콩 영화가 대세였다. 관객들은 바바리코트를 걸친 사연 많은 남자들이 벌이는 암투에 매료됐다. 하지만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홍콩 영화 열기는 빠르게 식었다. 이 틈에 대만 영화가 치고 나왔다. 세계 주요 영화 시상식에서 대만 감독들이 상을 휩쓸었다. 영화계는 이런 현상을 '대만 뉴웨이브'라고 불렀다. 이 물결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에드워드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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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페이 스토리`의 한 장면. /사진 제공=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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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 뉴웨이브'의 탄생

2017년 한국에서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이 개봉했다. 1991년에 제작된 영화가 26년 만에 지각 개봉한 것이다. 작년에는 '하나 그리고 둘'(2000)이 재개봉했다. 올해는 '타이페이 스토리'(1985)가 34년 만에 국내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오랫동안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미지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명성은 자자했지만, 접할 방법은 요원했다. 1990년대에 열악한 화질의 복제 비디오가 음성적으로 유통됐을 뿐이다.

에드워드 양을 비롯한 '대만 뉴웨이브' 주역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영화계에서 대만은 변방이었다. 민감한 정치 갈등이 뒤얽힌 대만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진지한 영화는 나오기 힘들었다. 금기는 언젠가 깨진다. 변화는 1982년에 개봉한 '광음적고사'부터였다. 젊은 감독 4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옴니버스 영화다. 지금 이 순간의 대만 사회를 날카롭게 바라보는 작품이었다. 에드워드 양은 두 번째 에피소드 연출을 맡아 주목받았다. 이후 첫 장편 데뷔작 '해탄적일천'(1983)과 '타이페이 스토리', '공포분자'(1986)를 차례대로 내놓으며 이름을 알렸다. 동갑내기 감독 허우 샤오시엔과 함께 대만 영화 희망으로 떠올랐다.

허우 샤오시엔은 '비정성시'(1989)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일본 지배에서 벗어난 직후 대만을 그린 작품이다. 격동하는 사회 속에서 애면글면 살아가는 사람들과, 격류에 휩쓸리는 삶을 조용히 비추는 영화다. '비정성시'로 허우 샤오시엔은 '대만 뉴웨이브' 주역 중에서 저 앞으로 치고 나갔다. 에드워드 양은 '비정성시'에 화답하듯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들고 세상에 나왔다. '비정성시'가 1940년대 후반 대만 사회를 담았다면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은 그로부터 10년 후의 대만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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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의 한 장면. /사진 제공=리틀빅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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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 현대사 다룬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61년 대만 수도 타이베이 한복판에서 14세 소년이 또래를 칼로 찔러 살인했다. 대만 최초 미성년자 살인으로 기록된 사건이다. 당시 에드워드 양은 살인을 저지른 소년과 같은 나이였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은 그날의 실제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대만 현대사 배경지식이 필요한 영화다. 대만은 일본에 50년간 식민통치를 받았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중국 본토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장제스의 국민당이 패권을 잡기 위해 내전을 벌인다. 싸움에서 밀린 국민당은 대만으로 도피해 새 거점을 세웠다. 대만에 살고 있었던 본성인은 국민당과 함께 밀려들어 온 외성인의 등쌀에 밀려난다. 수적으로는 본성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요직은 외성인이 독차지했다. 본성인과 외성인의 크고 작은 갈등이 이어졌다. 1947년 '2·28 사건'이라는 비극이 발생한다. 차별에 항의하는 본성인과 억누르려는 외성인이 물리적으로 충돌한 사건이었다. 이 사태로 학살당한 본성인은 최소 3만명이다. 본성인을 무력 진압한 국민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포로 대만을 다스린다. 계엄령은 40년이나 이어졌다. 이 기간에 '2·28 사건'은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되면 금기였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은 바로 이 시기에 관한 영화다.

영화 배경은 1960년 전후다. 주인공 소년 샤오쓰의 가족은 공산당 압제를 피해 중국에서 대만으로 넘어온 외성인이다. 당시 대만은 혼종 자체였다. 일본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라디오에선 일본 노래가 흐른다. 소년들은 일본군이 남기고 간 사무라이 검을 휘두르며 논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물결까지 가세한다. 소년들은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를 따라 부르고, 존 웨인 영화에 열광한다. 남겨진 것과 새로 밀려들어오는 것이 한데 뒤섞인다. 본성인과 외성인의 갈등처럼 뒤섞인 것들은 종종 불화한다. 불안한 어른들을 보며 성장하는 소년들은 저절로 힘의 논리를 체화한다. 갱단을 조직해 걸핏하면 경쟁 조직과 패싸움을 벌인다. 순박했던 소년 샤오쓰도 갱단과 어울린다. 가랑비에 옷 젖듯 폭력에 물든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어둡고 잔혹했던 시대에 관한 영화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애틋하다. 종종 아름답기까지 하다. 에드워드 양은 대만 역사와 개인의 기억 중 어느 하나를 우위에 두지 않는다. 영화는 주인공 샤오쓰 주변 인물에게도 충분히 지분을 부여한다. 난폭한 시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헤쳐나가려는 사람들을 거대한 풍경화처럼 펼쳐놓는다. 비난도 옹호도 하지 않는다. 이런 시대가 있었고, 이런 사람들이 살았노라고 보여줄 뿐이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A Brighter Summer Day'다. 샤오쓰와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눈부신 여름날'은 있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좋은 시절로부터 튕겨 나가 자신도 모르는 곳으로 떠내려가는 삶을 다룬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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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사진 제공=리틀빅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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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뒤통수도 못 보는 사람들

에드워드 양의 또 다른 대표작은 '하나 그리고 둘'이다. 이 영화는 정작 대만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이후 1990년대 중반부터 에드워드 양에게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대만 영화계는 중국 본토 출신에다가 미국 생활까지 오래 한 에드워드 양을 고깝게 여겼다. '지나치게 예술성만 추구하는 감독'이라는 쑥덕공론에 시달렸다. 돈이 안 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 탓에 대만 영화 산업이 발전하지 못한다며 공격했다. 에드워드 양은 자국에서 투자자를 찾기 어려웠다. '하나 그리고 둘'은 일본 자본으로 제작됐다. 그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전미비평가협회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뒤에도 대만 극장엔 걸리지 않았다.

영화는 여덟 살 꼬마 양양의 외삼촌 결혼식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미 신부 배 속에는 새 생명이 들어 있다. 같은 날 저녁, 집안의 큰 어른인 양양의 외할머니가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진다. 의사는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 탄생과 죽음을 나란히 놓고 시작한 영화는 삶이라는 여정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양양의 엄마는 깊은 회의에 빠진다. 침대에 누워 죽음만을 기다리는 엄마를 보며 허무함에 몸서리친다. 결국 잠시 집을 떠나 절에 머문다. 그사이 양양의 아빠는 30년 전 연인과 재회한다. 잊었다고 여긴 감정들이 다시 피어오른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다잡는다. 양양의 누나는 자기 때문에 외할머니가 쓰러졌다는 죄책감에 주눅 든다. 친구의 전 남자친구와 서툰 연애를 하다가 끝내 버림받기도 한다.

양양의 손엔 언제나 아빠가 준 카메라를 들려있다. 그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며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양양이 찍은 건 가족들의 뒤통수였다. 가족은 영화 마지막에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한데 모인다. 저마다의 풍랑에서 겨우 빠져나온 채로.

'하나 그리고 둘'은 손에 쥔 모래알 같은 삶을 다룬 작품이다. 내 것으로 생각한 내 삶이 서서히 줄어듦을 느낄 때 우린 외롭고 초조하다. 걱정은 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후회는 차곡차곡 쌓인다. 새로운 의미를 찾고 무언가를 쟁취하려 몸을 곧추세워도, 예고 없이 내리는 소나기 때문에 다시 웅크리고 만다. 영화는 자신의 뒤통수조차 못 보는 우리의 한계를 직시하고, 받아들이면 어떻겠냐고 말한다. 나를 대신해 나의 뒷모습을 바라봐주는 사람들과 부대끼고 위로하며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자고 말이다. 하나와 하나가 만나 둘이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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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사진 제공=리틀빅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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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인간의 수명을 세 배 늘렸다고?

'하나 그리고 둘'은 에드워드 양의 유작이다. 그는 2007년 결장암으로 눈을 감았다. 그래서 이 영화의 어떤 대사들은 감독의 유언처럼 들린다. 예컨대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영화가 탄생한 이래 인간의 수명이 세 배나 늘었대". 영화로 타인의 삶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인생 경험치도 늘어난다는 의미다.

에드워드 양은 훌륭한 영화를 보면 작품 속 현실을 직접 겪은 듯한 착각에 빠진다고 말했다. 관객들이 자신의 영화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길 원했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은 1960년대 대만의 불안한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게 한다. '하나 그리고 둘'은 관객들 저마다 자신의 삶을 천천히 되짚도록 만든다.

누구나 영화를 본다. 영웅이 나오는 영화, 권투선수가 나오는 영화, 요리사가 나오는 영화, 조폭이 나오는 영화, 노인이 나오는 영화.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관객들은 다른 세계에 산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아마도 에드워드 양의 영화처럼 우리의 수명을 늘려주는 작품일 테다.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타인을 헤아려보게 하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영화들. 인간에게 영화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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