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대로에 자동차가 사라지고 사람들로 채워질 거란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었던가? 사람들로 채워진 서초대로는 더 이상 도로가 아니라 ‘광장’이었다. 고가의 고층건물과 사유지 일색의 장소에도 모두를 위한 장소가 숨어 있었다. 그곳은 모두를 위한 ‘서초광장’이었다. 배우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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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람들은 신호등을 잘 안 지킨다. 분명 차가 달려오는데 그냥 차도에 내려선다. 빨간불에도 당당하게 길을 건넌다. 달려오던 차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멈춘다. 우리나라에선 운전자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이 야!’하며 한바탕 난리가 나겠지만 거긴 자동차들이 조용히 사람들이 다 건너기를 기다린다. 프랑스에 살면서 신기하게 여겼던 모습 중 하나가 어디서든 사람들은 건너고, 차는 서서 기다리는 그 풍경이었다. 그러니까, 신호랑 상관없이 사람이 도로에 내려서면 차는 무조건 멈춘다. 비록 빨간불이어도 ‘사람이 우선’ 이라는 법칙은 신호위반보다 상위에 있었다. 차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얼른 비켜주거나 차의 행로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는데, 도로에서도 사람이 먼저라고?
가만 떠올려보면 도로가 친근했던 기억이 있다. 자동차가 요즘처럼 많지 않았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는 아이들이 도로를 놀이터 삼아 놀기 일쑤였다. 우리집은 버스 종점 부근에 있어서 버스가 자주 왕래하는 도로였지만,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도로 위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자치기, 다방구 같은 놀이를 했다. 그러다 사고가 나기도 했다. 달려오는 버스를 보지 못하고 뛰어나갔다가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은 버스기사 아저씨로부터 혼쭐이 나기도 했다.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이런 놀이는 불가능해졌고, 도로는 절대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되는 곳이 되었다. 도로를 건널 땐 횡단보도로만 다녔고 자동차와 사람이 뒤섞이게 되면 무조건 차를 먼저 보내 주는 게 상식처럼 되었다. 보행자건 운전자건 도로의 주인은 자동차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도로에 대한 확고한 상식이 깨지기 시작한 건 ‘월드컵 거리응원’이었다. 그 넓은 도로에 차가 사라지고 사람으로 가득 찰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자동차 바퀴가 닿아야지 사람이 서 있으면 안 되는 아스팔트 위에 모여 앉아 전광판을 바라보며 응원가를 불렀다. 아스팔트의 감촉이 낯설었지만 한편 흥분되었다. 공간은 언제든지 전이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광화문 촛불집회와 서초동 촛불집회는 도로의 가능성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월드컵 같은 특별한 행사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 자동차를 몰아내고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었다. 서초대로에 자동차가 사라지고 사람들로 채워질 거란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었던가? 사람들로 채워진 서초대로는 더 이상 도로가 아니라 ‘광장’이었다. 고가의 고층건물과 사유지 일색의 장소에도 모두를 위한 장소가 숨어 있었다. 그곳은 모두를 위한 ‘서초광장’이었다.
도로는 왜 필요할까? 자동차가 다녀야 하니까! 그러면 자동차는 왜 필요할까?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다. 도로는 처음부터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도로가 사람들을 배척하고 있었음을 도로 위에서 알았다. 도로는 공공재다.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면서 건물 하나 갖는 게 꿈인 시대에 적어도 개인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공간이 도시 전체에 인프라로 깔려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의 새로운 쓰임새를 발견한 이 시대의 도시인들은 이제 신대륙을 본 셈이다.
도로는 보도와 차도를 합친 것이다. 현재 도시의 정책은 도로 중 차도는 줄이고 보도를 늘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도로에서 사람의 공간이 늘어나는 것이다. 자동차 일색이던 차도에 자전거가 다니고, 폐철로를 숲길로 바꿔 보도를 이어간다. 걷고 싶은 거리로 지정하여 주말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를 만들기도 하고, 서울로처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고가도로를 보행로로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요구할 때는 도로가 ‘광장’으로 바뀌며 도로의 쓰임을 다양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도로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이다. 언제나 사람이 먼저다.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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