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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토)

[만물상] 21세기 '백마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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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초·중학교 주변 서점을 주름잡던 참고서 표지에는 백마(白馬) 탄 나폴레옹 그림이 실려 있었다. 앞발을 치켜든 백마 위에서 망토를 휘날리며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리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모습은 영웅 그 자체다. 궁정화가의 작품인 이 그림은 진취적 지도자 이미지를 부각시켜 나폴레옹의 인기를 높이는 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 탄 것은 크고 역동적인 백마가 아니라 작은 노새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백마는 회색 말이 나이가 들면서 하얀 털이 많아진 것으로, 자연적인 백마는 매우 드물다. 이 때문에 새하얀 갈기를 휘날리는 백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물(靈物)로 대접받았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는 백마가 하늘로 올라간 자리에 남겨진 알에서 태어났고, 서양 신화에서 힘과 순결의 상징인 유니콘은 하늘을 나는 백마의 모습이다. 왕자나 기사(騎士)도 늘 백마를 타고 등장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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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들어서는 절대 군주나 전쟁 지휘자들이 주로 백마에 올랐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히로히토 일왕은 '눈보라(후부키·吹雪)'라는 이름의 백마를 탔다.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 '사막의 여우'로 불린 독일 롬멜 장군이 백마를 탄 사진도 남아 있다. 1945년 6월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열린 소련군 승전기념식에서는 스탈린 대신 전쟁 영웅 주코프 장군이 백마에 올라 군 사열을 했다. 백마가 앞발을 들고 일어나 스탈린이 타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엊그제 북한 매체가 김정은이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오른 사진 여러 장을 공개했다. 회색 털이 섞여 있는 다른 간부들의 말과 달리 김정은 말은 눈처럼 하얗고, 화려한 별 장식까지 달려 있다. 북은 3대에 걸쳐 백마를 소위 '백두 혈통'의 상징물로 삼아 왔다. 김일성·김정일이 백마를 타는 그림은 북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김일성이 백마를 타고 전장을 누비며 항일운동을 했다고 선전하는가 하면, 김정일을 위해선 '장군님 백마 타고 달리신다'라는 찬양 가요도 만들었다.

▶21세기에 말 타고 산에 오르는 시대착오 쇼가 북한 말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 가능할까. 북 매체들은 백마 위 김정은을 향해 "위대한 사색의 순간"이니 "세상이 놀랄 웅대한 작전이 펼쳐질 것"이니 하며 우상화에 나섰다.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등으로 북한의 정상 국가화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관측이 있었으나 백마 쇼는 모든 게 사기극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북한과 함께 코리안이라 불린다는 것이 정말 부끄럽다.

[임민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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