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옥의 금융산책]
실업률 떨어져도 물가 안 올라
세계금융위기 이후 고장 심각
IMF “물가, 짖지 않는 개 됐다”
재정·감세 직접수단 줘야 주장도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7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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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는 중앙은행의 북극성이다. 완전 고용과 물가 안정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중앙은행은 물가를 살펴보며 돈줄을 죄고 풀었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저성장과 저물가, 저금리의 뉴노멀로 접어들며 중앙은행의 북극성이 흔들리고 있다. 덩달아 통화정책의 스텝도 꼬이게 됐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커버스토리로 다룬 ‘세계 경제의 기이한 새로운 규칙’에서 분석한 새로운 경험인 셈이다.
중앙은행이 맞닥뜨린 위기를 드러내는 것은 ‘고장 난 필립스 곡선’이다. 필립스 곡선은 실업률과 물가상승률 사이의 역의 관계를 보여준다.
경기가 나빠져 실업률이 높아지면 물가는 떨어진다. 반대로 경기가 과열되면 실업률은 떨어지고 물가는 오른다. 때문에 필립스 곡선 상의 한 조합을 선택해 원하는 방식으로 경제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필립스 곡선의 오작동이 시작되며 각국 중앙은행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물가가 더 이상 통화정책의 지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실업률은 3.5%로 1969년 이후 최저치다. 하지만 물가상승률은 1.4%에 불과하다. 실업률로만 따지면 기준금리를 높여야 하지만, 물가 수준을 감안하면 통화 공급의 수도꼭지를 더 여는 것이 맞다. 중앙은행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다.
고장난 필립스 곡선 매커니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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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스 곡선의 오작동이 시작된 건 세계금융위기 이후다. 금융위기 당시 실업률은 치솟았지만 물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디플레이션이 사라진 것이다. 위기의 먹구름이 걷히고 고용 시장이 회복되며 실업률은 낮아졌지만 물가는 제자리걸음을 했다. 사라진 인플레이션이 문제가 됐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런 상황을 ‘짖지 않는 개’에 빗대기도 했다.
필립스 곡선이 무너진 원인에 대한 분석은 여럿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국제 공급망이 확대되면서 국내의 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통 혁신에 따른 가격 하락을 이끈 ‘아마존 효과’도 물가를 끌어내리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기술 혁신에 따른 무료 서비스의 증가도 물가 상승을 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구 고령화와 경기 둔화 우려 등으로 가계와 기업이 지갑을 열지 않는 것도 한몫한다. 가계의 과잉저축과 기업의 투자 부진도 물가 오름세를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필립스 곡선에 대한 저물가의 반항이 시작되며 물가가 더 이상 통화정책의 지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됐다. 그 결과 제로금리 혹은 마이너스 금리로 향하는 중앙은행의 행보에는 가속이 붙고 있다. 이는 저성장·저물가·저금리의 ‘3저 현상’이 뉴노멀이 되는 세계 경제 상황에서 ‘디플레 파이터’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중앙은행이 쓸 수 있는 카드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코노미스트는 “금리가 낮아지며 중앙은행이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줄고, (금리 인하와 같은) 경기 부양 수단은 동났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중앙은행에 ‘재정 정책형 수단’을 쥐여줘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스탠리 피셔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 부의장 등이 블랙록 보고서에서 제안한 ‘비상 대기 재정 수단’이 그중 하나다. 중앙은행이 새로운 재정 지출 자금 조달이나 감세 등을 위한 머니 프린팅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더 직접적이며 적극적인 수단도 나온다.
이코노미스트는 “일부 정치인의 주장대로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 찍어낸 돈을 국민 개개인의 계좌에 넣어주는 식의 재정 정책 수단을 중앙은행에 부여하는 건 간단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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