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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이틀만에 시효 다한 마지막 ‘조국 수호’ 집회 무엇을 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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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언론·야당 향한 무차별 혐오

조국 가족 향해선 범죄도 지지

검찰 개혁 내세운 조국 수호 집회

팬덤·거짓말 가득한 그날 서초동



서초동 9차 촛불집회의 한복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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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서초집회 주최측은 대검찰청 외벽에 ‘당신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공수처 설치’같은 문구를 담은 빔 프로젝트를 연신 쏘아댔다. 도로엔 조국 얼굴 사진에 ‘조국 수호 우리가 조국이다’라는 문구가 담긴 피켓이 물결쳤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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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토요일 저녁, 문득 서울 서초동이 궁금했다. 그래서 혼자 지하철을 탔다. 교대역 승강장에 내리자마자 집회현장을 안내하는 큰 안내판이 보였다. 여기서 나갈까 잠시 고민하다 서초역으로 가는 2호선으로 갈아탔다. 서울시 산하 서울교통공사가 운영하는 이 객차 안에서도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집회에 참석하시는 분들은 1, 2, 3, 4번 출구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배려도 서울시장 덕분인 걸까. “자한당 해체” 구호와 “주인 물어뜯는 떡검” “빨대 꽂아 국민 고혈 뽑아먹는 언론” 같은 검찰과 언론을 향한 혐오의 언어가 난무했던 이날 집회 중 유독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감사인사가 잦았다. 서초역 사거리에서 지난 12일, 그러니까 조국 법무부 장관 사퇴 이틀 전 마지막으로 열린 제9차 ‘검찰 개혁 촛불 문화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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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2일서초 집회 현장. 오후 6시에 이미 도로를 가득 메웠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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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시간인 오후 6시에 딱 맞춰 도착했는데 서초역 사거리 네 방향 메인도로엔 이미 사람들이 줄 맞춰 꽉 들어차 있었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고령의 참가자가 많았다. 비어있는 사거리 한복판을 한 바퀴 돌아 반포대로 옆 보도를 따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기엔 정경심도, 이재명도, 세월호도 있었는데 정작 검찰 개혁은 없었다. 현장에서 맞닥뜨린 건 이날로부터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시효를 다한 공허한 ‘조국 수호’와 ‘공수처 설치’ 구호가 전부였다.

팬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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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2일 서초 집회에 쌓여있는 대나무 더미.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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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에서 올라오자마자 죽창 같은 대나무 더미가 보여 잠시 긴장했지만 신해철의 ‘그대에게’가 쩌렁쩌렁 울린 덕분인지 금세 축제 같은 분위기로 돌변했다. 네 방향 모두 설치된 초대형 스크린은 그 자체로 압도적이었다. 도로를 메운 사람들 손엔 이미 ‘조국수호 검찰개혁’ ‘조국수호 우리가 조국이다’ 같은 피켓이 여러 장 들려 있었는데 ‘정치검찰 OUT’ ‘기레기 OUT’이라고 적힌 피켓 더미가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 온 것인지, 아니면 돈줄이 탄탄해 원래 이렇게 많이 찍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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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엔 이미 피켓을 든 인파로 거리를 가득 메웠다. 오후 6시에도 피켓이 쌓여 있었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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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높이 쳐든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법무부 장관 얼굴 펜화가 그려진 피켓을 따라 가보니 ‘이재명 경기도지사 상고심 무죄 범국민대책위’가 무죄 청원 서명을 받고 있었다. 메인도로는 조국 잔치였지만 양쪽 보도는 이재명 무대라 할 정도로 서명 부스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지난 8차 집회 때 ‘세월호참사전면재수사’라는 노란색 대형 피켓을 앞세워 메인 무대 맨 앞줄에 앉았던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는 이번엔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낸 정청래 마포을지역위원장과 함께 재조사 서명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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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2일 검찰 개혁을 위한 서초 집회 현장엔 당선 무효형을 받은 이재명 경기도지사 무죄 청원 서명 부스가 많았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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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9년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으로 착각할 만큼 뭔가 비현실적이었다. 세월호 사고로 죽은 아이들에게 “고맙다”며 집권한 문 대통령 임기가 반환점을 도는 이즈음 이 여당 인사는 대체 누구에게 뭘 더 재조사하라는 걸까. 검찰 개혁을 빙자해 이렇게 모두 자기 장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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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현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낸 정청래씨가 세월호참사전면재수사 서명을 받고 있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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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날의 주인공은 역시 조국이었다. 무대 위 스크린에서는 그의 웃는 얼굴 동영상이 반복됐고 인파 속에서는 그의 얼굴 사진을 박아넣은 ‘조국 수호’ 피켓이 물결쳤다. 개그맨 강성범, 서울대 우희종 교수 등이 무대에 서서 조국 수호 연설을 했다. 대검찰청 외벽엔 ‘당신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라는 빔 프로젝트가 반복됐다. 아이돌 스타 못지않은 팬덤의 향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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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 돌아다니는 조국 수호 집회 사진. '미남보존협회' 명의의 현수막과 피켓이 많이 보인다. [페이스북 캡처]



팬덤의 실체는 딱 둘로 나뉜다. 하나는 그의 외모, 따른 하나는 문프(문 대통령) 지지의 연장선이다. SNS에서 숱하게 봤던 ‘전국미남보존협회’ 명의의 ‘힘내라 조국’ 현수막과 깃발이 나부끼는 건 그의 외모에서 기인한다. 그가 뭘 했는지, 또 뭘 할 수 있는지보다 그의 외모에 끌린 팬덤은 증거 인멸 범죄의 피고인인 그의 아내 정경심 교수와 대학·대학원, 의전원까지 모두 가짜 스펙으로 들어간 그의 딸 조민씨로까지 확장됐다.

이날 집회 사회를 맡은 개그맨 노정렬은 검찰의 비공개 소환을 비롯해 조사 시간보다 조서 열람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온갖 특혜를 받은 정 교수를 놓고 거꾸로 “떡검들이 초미세먼지털이식으로 망신주고 인격모독했다”며 “정 교수님 힘내세요 사랑합니다”를 선창했다. 지난 집회 땐 생일날 온 가족이 모여 생일 파티를 못 한 조민씨가 불쌍하다며 생일노래 떼창까지 나왔다고 한다.

기자들이 28세인 조민씨를 밤 10시에 찾아갔다고 인권유린이라며 목청을 높이는 이 사람들은 불과 3년 전 고작 20살짜리 젊은 여성에게 가해진 온갖 모진 일엔 환호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두 돌 안 된 아이와 함께 덴마크에 머물던 최순실의 딸 정유라 얘기다. 그를 좇던 기자는 한밤에 정유라를 발견하자 불법체류로 현지경찰에 고발했고, 불법체류가 아니었던 정씨는 현지 경찰에 구금당한 후 특검의 긴박한 범죄인인도 청구 요구로 감옥에 구금됐다 결국 수개월 만에 수갑을 찬 채 귀국해 포토라인에 섰다. 입시 비리로 이미 고교 졸업 자격까지 박탈된 그에게 당시 특검은 입시비리에 따른 업무 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다고도 윽박질렀다. 입시 비리의 기획자가 아닌 수혜자라는 점에서 조민씨와 똑같은 상황이었는데 검찰과 언론에서 받은 대우는 이렇게 달랐다. 누구도 인권을 말하지 않았다.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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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2일 서초집회에서 배포한 '최신정보'라는 신문. 1면톱 기사는 검사와 언론의 혐오 내용을 담은 '검사의 개가 된 기자 한국 검찰은 어떻게 언론을 장악했나'이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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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무대 위 유명인사들의 발언은 대부분 거짓 선동이었다. 노정렬은 처음부터 대놓고 거짓말이었다. “서울대 연고대 일부 대학생들이 알지도 못하고 (조 장관 딸 조민씨가) 장학금이니 뭐니 특혜를 받았네 엄마 아빠 찬스를 썼네 하고 있는데 몽땅 다 거짓말”이라고 외쳤다. 명백한 사실도 부정되는 이 서초집회 현장에서 배포 중인 ‘최신정보’라는 4면짜리 신문 1면 톱기사 제목은 ‘검사의 개가 된 기자 한국 검찰은 어떻게 언론을 장악했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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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5일 열렸던 8차 서초 집회.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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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차 집회엔 서울신문이, 이번 9차 집회는 YTN이 수 시간에 걸친 집회 전 과정을 온라인으로 실시간 생중계하고 지상파 KBS·MBC는 물론 친여매체 한겨레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언론은 사실상 조국 가족 수사 중단을 위한 촛불집회에 검찰 개혁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한 왜곡에 가까운 보도를 경쟁적으로 내보냈다. 그런데도 이들은 고위 공직자와 그 가족의 비리 의혹, 즉 사실을 보도하는 소수의 언론을 적폐로 몰며 언론개혁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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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무효형을 받은 이재명 경기도지사 무죄 청원 부스가 많이 보였다. 서명하면 조국 펜화를 나눠줬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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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이 『광장』을 처음 쓴 1960년의 그 광장으로 타임머신을 탄듯한 착각에 빠질 지경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월북한 후 노동신문 본사 편집부에서 근무하게 된 이명준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그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했다는 이유로 자아비판대에 서서 “사실을 보도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추궁당한다. 편집장은 “인민의 적개심을 고무시키는 방향으로 취사선택이 가해져야지 무책임한 사실의 나열을 일삼는 건 자본주의 신문”이라면서 “(사실을 옮기면) 인민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째 딱 지금의 우리 상황 같지 않나. 조지 오웰이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선 진실을 말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말한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을 지낸 사회학자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지, 저마다의 사실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게 일반인의 상식이지만 서초 집회에선 이런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그저 조국 수호만 앵무새처럼 외쳤다.

서초역 4번 출구에서부터 시작해 반포대로 저 아래 누에다리 너머 조국 사퇴 집회를 거쳐 우리공화당의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 집회’를 끝으로 이날 서초 집회 참관을 마쳤다. 조국 수호만 있고 검찰 개혁은 없는 검찰 개혁 집회, 처음부터 명분이 없었던 이 집회를 기다리고 있던 건 그땐 몰랐지만 조국의 사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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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2일서초동에선 조국 사퇴를 요구하는 집회도 열렸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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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이 『광장』에서 ‘역사는 흔히 개가죽을 쓰고 호랑이 춤을 추지 않더냐’며 ‘때가 되면 개가죽은 동댕이쳐질 텐데 왜 어리석게 앙앙거리느냐’고 한 것처럼, 우리의 현실도 딱 이랬다. 개가죽은 이렇게 벗겨졌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시대에 뒤떨어진 팬덤과 본색을 드러낸 그들의 거짓말뿐이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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