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공화정 역시 귀족, 기사, 평민 계급의 투표를 통해 국정 현안을 결정하는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평민들은 공화정에 불만을 표시하며 오늘날 ‘몬테 사크로(Monte Sacro)’라고 불리는 성산(聖山)에 올라 농성했다. 집단 파업을 일으킨 것이다. 절차에 따라 투표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로마공화정의 투표는 귀족, 기사, 그리고 마지막에 평민이 투표하게 되어 있었다. 귀족과 기사 계급이 담합해 투표를 마치고 나면 평민은 표결에 참여하기도 전에 결정이 끝났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쟁점이 발생해도 금세 다른 쟁점에 덮이는 사회라고 한다. 초스피드로 움직이는 이 세계에서 나날이 발생하는 모든 쟁점을 파악하고,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거나 전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상 표결이 끝난 뒤에나 도착한다. 과거 디지털미디어의 주류가 PC 기반의 웹(Web)이던 시절이 영화 <엑스맨>의 ‘퀵실버’가 움직이는 정도의 속도였다면, 모바일 플랫폼 앱(App)의 시대인 현재는 ‘퀵실버’에 더해 공간을 순간 이동하는 ‘나이트 크롤러’까지 합세한 스피드로 움직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정치가 되었든, 문화가 되었든 평론가만큼 힘든 직업은 없을 것이다.
디지털미디어 시대,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는 계급이 아니라 이슈에 따라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이고 분산된 대중이다. 과거의 대중이 조직이나 명망가를 중심으로 몸의 연대를 구사했다면, 오늘날의 대중은 여러 차원으로 분산되고 다양한 구성을 지니고 있기에 분석하기 어렵다. 과거의 대중이 일정한 형태를 가진 고체였다면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대중은 정보와 이슈에 따라 액체처럼 유동하다가 이슈와 함께 증발한다. 문제는 그와 같은 시대이기에 선동(propaganda)에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영주의와 진영논리를 염려하지만, 오늘날의 디지털 대중은 특정한 이즘과 이론을 따르지 않는 탈이념적 대중이라는 점에서 요동치는 물결이다. 과거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대중문화가 사회적 시멘트 역할을 한다고 비판했지만, 오늘날의 대중은 ‘접착’이 아니라 간단한 ‘접속’으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소셜미디어의 개인은 분절과 동종집단화 과정의 무한 반복(폐절, 차단 등의 자체 필터링 과정)을 통해 ‘취향최적화’를 이뤄 나간다.
동종의 취향을 공유한 집단은 공론화 과정에서 그들의 취향에 거슬리는 집단을 힘으로 억압하고 싶은 손쉬운 유혹에 빠지게 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감과 나눔을 반복할수록 배타적 집단의식이 강화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빚는 것이다. 여기에 선동의 대가인 에드워드 버네이즈나 괴벨스도 울고 갈 만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지식인(Digerati)들이 언론인을 자처하며 미디어 공간을 점유해 나간다. 하이테크놀로지로 무장한 친절한 선동가와 대변자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주변에 당신의 주장과 생각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없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당신은 이미 커다란 위험에 빠졌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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