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빵떡씨의 엄마는 모르는 스무살 자취생활(4)
나와 동생의 독립은 공간의 독립이자 경제적 독립이었다. 생활비부터 전기세, 수도세 같은 자잘한 비용도 우리가 부담하기 시작했고, 그간 모아 놓은 돈과 내 명의로 받은 대출금을 합쳐 전세금을 마련했다. 하지만 100%의 독립은 아닌 것이 전세금의 1/4은 부모님이 마련해주셨기 때문이다. 묘하게 비독립적인 독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묘한 경계에 있는 게 교통비다. 나와 동생은 대학생 때부터 엄마 명의의 후불 교통카드를 사용했다. 직장 생활을 한 후부터는 ‘교통카드를 따로 만들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엄카’의 안락함과 교통카드 생성의 귀찮음에 떠밀려 이 나이 먹도록 엄마 명의의 교통카드를 사용하고 있다.
나와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의 전세금 1/4은 부모님이 마련해주셨다. 묘하게 비독립적인 독립인데 그중 가장 묘한 경계에 있는 게 교통비다. [사진 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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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동생 중 누구도 교통카드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관성 같은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불행은 언제나 아무도 생각지 못한 순간 뒤통수를 후드려 치는 법. 나와 동생은 어느 날 엄마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게 되는데….
‘빵떡아, 석구야. 너희 교통카드 내역 엄마가 다 확인할 수 있는 거 알고 있지? 이 말 무슨 뜻인지 알 거야 너네. 주말에 집에 오면 얘기 좀 하자.’
우리나라에는 당황스러운 상황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관용구가 있다. ‘하늘이 노랗다’든가 ‘심장이 철렁하다’든가 ‘간이 떨어지다’든가…. 먼지 쌓인 구닥다리 표현으로만 여겼던 그 많은 문장이 한꺼번에 나를 습격해왔다. 하늘이 떨어지고 심장이 노래지며 간이 철렁했다. 그간 말없이 해온 외박과 밤늦게 귀가한 날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추락하는 주가를 목격하는 투자자처럼 조바심을 치다가 넋이 나갔다가 하며 제정신이 아니었다. 허둥지둥 퇴근해 집에 오니 석구가 바닥에 널브러져 흐릿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우리는 동병상련에서 오는 애달픈 우애를 느끼며 한동안 탄식했다.
우리가 쓴 교통카드 내역을 엄마가 다 확인할 수 있다니. 주말에 집에 오면 얘기 좀 하자는 엄마의 문자에 심장이 철렁했다. 말없이 해온 외박과 밤늦게 귀가한 날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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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모든 것을 다 아실걸…. 내가 검색해 봤더니 카드 내역 조회하면 최근 4개월간 승하차 위치랑 시간까지 다 나온대.”
“그런 기능은 왜 있는 거냐 도대체.”
“몰라…. 근데 우리가 스물여섯 살이나 됐는데 어디 다녔는지 확인하시는 건 너무한 일 아니냐”
“그럼 진작 교통카드를 새로 만들었어야지….”
“아니 그렇다고 사생활을 다 보셔도 되는 거냐.”
“…나 너무 스트레스 받았더니 위가 다 아프다.”
석구와 나는 이번 기회에 정신적 스트레스가 신체적 질병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동그란 나무 테이블에 마주 앉아 대책을 강구했다. 온건파는 그저 진심 어린 사죄와 눈물의 호소만이 대책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맞서 강경파는 우리 나이가 벌써 스물보단 서른에 가까운데 자유로운 외박에 관해 이야기해보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냈다.
우리 부모님은 학점이나 진로에 대해선 ‘너희 알아서 잘’ 정도의 입장이셨지만 유난히 늦은 귀가와 외박에 대해선 어림없으셨다. 내가 대학생 땐 통금 시간은 이르고, 집은 멀었다. 그래서 술자리에서도 아홉 시만 되면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시계를 들여다보다 아홉 시 반이 되면 벌떡 일어나 도주범처럼 튀어 나가야 했다. 밤샘 팀 과제가 있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이 엄해 가봐야 한다며 주섬주섬 짐을 챙기면 선배들의 “쟤는 뭔데 맨날 일찍 가냐”는 소리가 따갑게 꽂혔다.
그렇게 집에 가도 “또 늦었냐”는 소리를 피하기는 어려웠다. 집 안팎으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 자기연민에 취하는 날이면 서러움에 북받쳐 옹알이인지 반항인지를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애들 외박한다고 너네도 할 거냐. 그게 좋아 보이면 그 집 가서 살아라’는 답변으로 일축되곤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무기력해졌다.
외박과 늦은 귀가는 그냥, 무조건, 아무튼 안 되는 일이었다. 아들, 딸 예외는 없었다. 부모님은 ‘위험하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난 그 외에도 부모님에게 자라온 시대·가정환경에서 기인한 외박에 대한 부정적인 강박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합리적인 이유에 따라 외박을 반대하시는 게 아니라 외박이라면 일단 싫은 느낌부터 드는 것이다.
동생과 나에게 외박과 늦은 귀가는 그냥 무조건 안 되는 일이었다. 외박에 대해 어렵게 말을 꺼냈지만 부모님의 입장은 생각보다 더 완강했다. [사진 pixabay] |
친구들은 ‘자유는 싸워서 쟁취하는 거다. 말없이 외박 몇 번 하면 통금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밤새 잠 못 잘 엄마와 뒷목 잡을 아빠를 생각하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번의 실랑이와 큰 소리, 울음, 적막함을 거치며 나는 서서히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친구들이 여행을 가자고 하면 반대하는 부모님이 먼저 생각나 내 선에서 거절했다. 부모님 입장에선 무해하고 온건한 딸이 되어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외박과 귀가에 대한 지리한 불화의 역사를 돌이켜 보니 온건파 역시 ‘그래, 진지하게 대화를 해 볼 때도 되었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온건파와 강경파는 두근두근한 마음을 안고 본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우리는 곧 우리가 얼마나 큰 착각을 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본회의장이 아닌 청문회장에 온 것이었다! 나와 동생은 보고 내용과 다른 버스 이용 시간과 장소에 대해 해명하고 사죄했다. 어렵게 대화를 해보자는 말을 꺼냈지만 반응은 생각보다도 더 완강했다.
"외박에 대해서 대화를 해보자고?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너네 미쳤구나? 안 돼. 절대 안 돼.”
너무 단칼에 거절당해서 우리는 조금 머쓱한 기분이 되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나와 동생은 패잔병처럼 생기가 없었다. 아직도 우리 집에서 부모님의 ‘안돼’는 너무 크고 강력한 ‘안돼’였다. 어떤 종교인들에게 그들이 믿는 신의 존재처럼 반박할 이유도 없고 반박해서도 안 되는 신성한 것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분위기는 얼어붙고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조금 불경해졌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우리는 이 ‘안돼’에 주로 진다.
인터넷에 ‘외박’ ‘부모님’ ‘갈등’ 등으로 검색해 보면 비슷한 고민을 하는 20대(심지어 30대도!)가 많다. 고민 글을 읽는 사람들 역시 주로 20대여서 답 글은 ‘경제적으로 100% 독립하세요’ ‘자취가 답입니다’ ‘아무리 설득해도 부모님은 바뀌지 않습니다’와 같이 화해보다는 부모님과 멀어지길 권하는 내용이 주다. 갈등이 클수록 해결 방법은 아예 소통을 단절하는 등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한쪽의 입장이 ‘아무튼 안돼’라면, 다른 한쪽이 취할 수 있는 입장은 ‘아무튼 탈출하자’가 되기 쉽다. 얽매여 있거나 완전히 벗어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사이 어딘가에 있고 싶다. 어느 정도는 부모님에게 얽혀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자율적일 수 있었으면 한다.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냥’ ‘아무튼’ ‘무조건’이 아니라, 조건과 이유를 갖고 서로의 삶에 긍정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직장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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