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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스스로 ‘철거한’ 죽음의 행위까지 예술로 여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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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옥인콜렉티브 이정민·진시우 부부를 기리며

한겨레

옥인콜렉티브의 이정민·진시우 부부 작가가 지난 8월 돌연 목숨을 끊었다. 2009년 (작가들의 아지트였던 종로의) 옥인아파트 철거를 계기로 결성된 옥인콜렉티브는 도시 삶의 갈등과 모순을 예술의 활력으로 치유하고자 했던 한국의 대표적인 공공미술 그룹이었다. 지난해 겨울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한 ‘2018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올랐을 만큼 촉망받는 작가들이었는데, 이렇게 황망히 떠나니 아쉬움을 금할 길 없다.

지인들에게 남긴 유서에서 고인들은 죽음의 이유를 “옥인 내부 문제(콜렉티브 운영에 대한 구성원들간의 반목)로 야기된 고통”과 “(그로 인해 연대와 협력이라는 콜렉티브의 가치를 훼손한) 큰 죄에 대한 책임”으로 설명하며, 옥인의 단명한 역사에 대한 “허망함과 피로”를 호소했다. 그리고 “바보 같겠지만 작가는 작업을 만드는 사람, 예술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삶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덧붙였다. 아마도 그러한 삶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있었으리라. 어쩌면 예술가의 삶 자체가 영원히 보상 없이 지속되는 것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토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옥인콜렉티브의 죽음은 그렇게 오늘날 예술가로 사는 삶의 위기와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모든 예술가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남겼다. 단지 유명한 작가들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가라는 삶이 너무 낡아 곧 철거되리라는 예감이 이들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가시화되었기에 더 충격적인 것이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예약 메일’로 유서를 남긴 것과 같은 정황들이 내게는 이 죽음을 그들의 마지막 (예술) 행위로 여기게 한다. 콜렉티브의 신념이 낡고 누추해져 붕괴 직전에 이르자, 그들이 결국 지켜내지 못한 옥인아파트처럼, 스스로를 철거함으로써 세계의 완고한 모순에 휘말려 희생되는 예술(가)의 불우한 운명을 시연하고자 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고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삶을 옥인아파트의 삶과 동일시 함으로써, 그 감옥 같은 삶에 자기 자신들을 가둠으로써, ‘옥인’(玉仁)의 이상이 ’옥인’(獄人)으로 마감되는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 지고한 자기 투신에 살아있는 우리가 더 무엇을 따져 물을 수 있을까? 그들은 죽음으로써 죽음 같은 삶을 그려낸 것이다.

누군가는 이들의 죽음이 ‘수익을 내기 힘든 옥인의 실험적 예술로 인한 생활고’ 때문이라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 싫다. 돈이 없고 생활이 힘들어 자살을 택했으리라는 추측은 ‘굶어 죽은’ 작가 최고은과 동시대를 산 우리에게 결코 간과될 수 없지만, 옥인의 죽음을 다시 한 번 동일한 좌절과 패배감으로 매듭짓고 싶지는 않다. 옥인의 작가들에게 가난은 영감이자 예술적 주제였지 결코 좌절의 원인이 아니었다. 그들의 작업이 수익을 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예술의 수익성과 배금주의에 대항했던 옥인의 투쟁이 승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들이 무능한 실패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작업이 항상 낮은 곳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흔한 소재로, 마치 놀이처럼 전개된 것은 바로 그러한 태도가, 그러한 미적 관습의 절제와 포기가 옥인의 신념에 가장 적합한 ‘삶-형식’(forma vitae)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수도사의 삶처럼 ‘빈한함’을 신념의 징표로 간직하고, 세상의 가장 부조리한 곳에서 축복받지 못한 이들과 어울려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고 위로하며 살았다. 세속적 욕망과 번민이 왜 없었겠냐만, 그러한 인간적 방황과 일탈조차도 ‘예술이 전부인 삶’ 속으로 승화되고 마는 수도의 과정이었으리라. 조르조 아감벤이 중세 수도사의 삶을 고찰하며 말했 듯, 모든 숭고한 신념은 빈한한 삶에 깃드는 것이며, 가난함은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시험이자 은총인 것이다.

나는 생전에 고인들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었지만, 이런 생각을 꽤 오랫동안 해오며 옥인콜렉티브를 눈여겨 봐왔다. 그들이 그처럼 황망히 세상을 떠난 뒤에야, 왜 이런 생각을 조금 더 일찍 나누지 못했을까 하는 자괴감이 든다. 비평은 항상 예술의 뒤를 밟기 마련이지만, 요즘처럼 비평의 느린 발걸음이 원망스러운 적도 없다. 나는 곧 옥인콜렉티브와 같은 공공미술의 ‘빈한한’ 실천, 그 숭고한 형식적 가난함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것이다. 오늘도 비좁은 작업실에서 가난한 삶을 묵묵히 감내해내며 자신의 예술을 펼쳐나가고 있을 또 다른 ‘옥인들’에게, 당신의 빈한함을 믿고 따르는 나와 같은 열광적인 예술의 신도가 있음을 말해주고 싶다. 그 청빈한 삶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고통 끝에 결국 당도하고 말 은총과 구원을 기쁜 마음으로 함께 기다리는 우리 관객들이 있음을 부디 잊지 마시길 바란다.

최종철 미술비평가·일본 미야자키국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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