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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흔들리는 서구 민주주의… 배후엔 러시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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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트럼프 대통령 당선엔 러시아의 공작이 있었다고 주장

시리아 공습해 메르켈 궁지 몰고 가짜 뉴스 만들어 위기 조성하며 주변 국가의 민주주의 약화시켜

조선일보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티머시 스나이더 지음|유강은 옮김|부키|456쪽|2만원

영국 브렉시트, 극우 포퓰리즘의 부상, 트럼프 대통령 당선…. 2010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들이다. 여기에는 공통의 배후, 즉 러시아의 대외 공작이 있었다고 티머시 스나이더 미 예일대 사학과 교수는 지적한다. 트럼프 집권 이후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한 '폭정', 홀로코스트의 본질과 교훈을 재해석한 '블랙어스' 등으로 주목받아 온 저자는 오늘날 뜨겁게 거론되고 있는 민주주의 위기 현상을 국제정치 맥락 안에서 재해석했다.

소련 붕괴 이전부터 지금까지 러시아는 3명의 대통령을 배출했지만 결코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특히 권력을 분점한 올리가르히(신흥 재벌)들이 과두 지배체제 유지를 위해 선택한 후계자 푸틴은 등장 과정부터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1999년 러시아 내 여러 도시에서 자작극으로 의심되는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체첸인 소행이란 주장이 확산됐다. 증거는 없었다. 올리가르히 세력은 그해 연초 2% 지지율에 머물렀던 무명의 푸틴을 '위기 해결사'로 등장시켜 45% 넘게 지지도를 끌어올린 끝에 권좌에 앉혔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 위기를 조성한 경험은 두고두고 러시아 민주주의를 억누르는 데 활용됐다. 2002년 모스크바 극장 인질사건은 국가의 방송 장악 빌미가 됐고, 2년 뒤 지방의 한 학교가 테러리스트에게 포위된 사건은 선출직 주지사 폐지로 귀결됐다. 외국 NGO(비정부기구)에 정보를 제공하면 반역죄로 처벌하고, 어떤 형태로든 외국 돈을 받은 NGO는 '외국 대리인'으로 등록해야 하는 법도 통과됐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신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선거는 이뤄졌지만 투표는 조작됐다.

체제는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러시아인들이 부러워하는 서방 민주주의는 푸틴 권위주의 통치의 정당성을 갉아먹는 항구적 위험 요인이었다. 푸틴은 서방의 민주주의를 약화시킴으로써 러시아 국민의 본보기가 되는 걸 막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슬람 무장 정파 IS로 둔갑시킨 해커들을 프랑스 방송국 전산망에 침입시켜 프랑스인을 협박하는 메시지를 방송하게 함으로써 마크롱과 맞붙은 국민전선의 르펜을 지원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메르켈 독일 총리가 난민을 더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하자, 러시아 군부가 시리아를 공습해 대규모 난민을 발생시킴으로써 메르켈을 궁지로 몬 사례도 든다.

영국 브렉시트 사태는 러시아의 대서방 공작이 거둔 빛나는 승리다. 러시아 방송사인 RT, 수백만 개의 메시지를 무한 발송하는 봇(bot), 특정 이슈에 달려들어 논쟁을 일으키는 트롤(troll) 등이 영국 전산망에 들어가 유럽연합 탈퇴 여론을 조성했다. 마지막 공격 목표는 2016년 미 대선이었다. 저자는 트럼프가 1980년대부터 러시아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뉴욕 트럼프타워는 러시아 재벌들의 돈세탁 장소로 쓰였으며, 러시아가 트럼프의 당선을 돕기 위해 힐러리 클린턴 관련 가짜 뉴스를 만들고 유통한 사례 등을 열거한다.

러시아 신권위주의는 유럽과 미국을 휘젓고 귀환해 자국 민주주의를 더욱 궁지로 몰아갔다. 2014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 대통령은 TV에 나와 "병력을 보낸 적이 없으며, 전투는 우크라이나 내 친러시아 민병의 봉기 탓"이라고 주장했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푸틴의 거짓 선언 때문에 전사자 가족들은 침묵을 강요당했고, 사상자 수를 보도한 기자들은 테러를 당한 뒤 입을 다물었다.

세계 곳곳에서 수상한 정치 형태가 등장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부자유(new unfreedom)가 나타나고 있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20세기의 거대한 폭력을 경험하고도 인류가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련 붕괴 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저서 '역사의 종언'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언했다. 승리를 확신한 서방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전체주의가 끼친 해악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의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면 역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로 관계없어 보였던 국제 뉴스를 가짜 민주주의의 확산이란 테마로 수렴해 제시하는 저자의 능력이 돋보인다.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조선일보

오른쪽 위부터 브렉시트에 반대하며 유럽연합 깃발을 들고 있는 영국 시민들. 친(親)러시아 대통령 야누코비치를 실각시킨 뒤 장갑차를 타고 키예프의 마이단 광장을 가로질러 달리는 우크라이나 시위대. 2016 대선에서 승리한 후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중앙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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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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