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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홍세화 칼럼] 상징폭력과 정신의 신자유주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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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선 절제되지 않는 탐욕으로 인간다움을 잃고 다른 쪽에선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 때문에 인간다움을 잃는, ‘정신의 신자유주의화’가 완성 단계에 이르러 연대와 사회정의, 공공성의 사회주의적 가치는 조롱거리가 되거나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만 남은 듯하다.

한겨레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개인적으로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에 비해 언론자유가 위축되었다고 느낄 만큼 자기검열을 하며 이 글을 쓴다. 사모펀드가 불법이냐 아니냐를 떠나 사회주의자와 그것이 모순된 조합으로 내 뇌리에 다가온 것은 주식·펀드가 하나도 없는 무능력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원외 소수정당인 노동당 당원으로서 지금껏 소중하게 간직해 온 사회주의의 가치가 가볍게 능멸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의 고위 공직자 중에서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칭한 조국 법무부 장관이 사모펀드와 연관된 유일한 인사라고 한다.

인간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이 되지 못하는 한편, 하면 안 될 일을 멈추지 않을 때 괴물이 될 위험이 있다. 간디는 “신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만, 단 한 사람의 탐욕도 만족시킬 수 없다”고 했다. 신자유주의는 경쟁과 효율성의 이름으로 인간의 탐욕에 합리성을 부여했다. ‘조국 사태’를 통해, 모든 경쟁 과정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 탐욕의 그림자를 본 게 나만의 일일까. 나에겐 그 탐욕이 불법인가 아닌가는 이차적인 문제다. 탐욕이 용인되는 것을 넘어 권장되는 신자유주의체제 아래 양극화된 사회가 정의로울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 가진 자와 힘센 자의 탐욕이 가진 자와 힘센 자의 것이어서 제어되기 어려운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기본적인 생존 조건도 충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쪽에선 절제되지 않는 탐욕으로 인간다움을 잃고 다른 쪽에선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 때문에 인간다움을 잃는, ‘정신의 신자유주의화’가 완성 단계에 이르러 연대와 사회정의, 공공성의 사회주의적 가치는 조롱거리가 되거나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만 남은 듯하다.

한겨레

태극기 부대나 광화문 집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하자. 자유한국당과 ‘조중동’은 애당초 사익 추구 집단으로서 민주주의와 사회공공성의 진전에 걸림돌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대해서도 재론하지 않기로 하자. 또 진영 논리가 정책과 이념을 실종시켰고, 정치인에 대한 좋거나 싫은 감정에 따른 팬덤 정치가 옳고 그름의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했으며,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하는 일방통행만 있고 청년들이 미래를 설계하기 어려운 현실인데 정치가 이 문제에 관해 논하지 않은 채 정치로 남아 있는, 모리스 블랑쇼가 ‘정치의 본질적 타락’이라고 말한 상황에 대해서도 길게 말하지 않기로 하자.

이 글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박근혜를 불쌍해하는 민초들이 당하는 상징폭력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상징폭력은 피지배자들에게 사회적 위계를 정당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물리력에 의존하지 않고 복종하도록 이끄는 지배 기제다. 몸에 가하는 폭력과 달리, 상징폭력은 피지배자들에게 지배자들의 세계관, 의식과 욕망을 갖게 하는 것으로,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열등감을, 스스로 부정적이거나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래서 노동자와 서민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 정치인이나 연예인, 유명인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반면, 자기와 같은 처지의 노동자, 서민에게는 무관심하다. 관심이 없으니 노동자, 서민이 당하는 고통과 불행에는 분노를 느끼지 않는 반면, 좋아하는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겪는 작은 고통과 불행에는 열화와 같은 분노를 일으킨다. 프랑스처럼 공교육 등 사회화 과정으로 계급의식이 형성되는 곳에서도 상징폭력이 관철될 때, 이 땅에서 “우리가 조국이다!” 등의 구호는 별 저항을 받지 않는다. 서초동 집회 참석 인원이 200만명이든 20만명이든 11시간 압수수색에 분노했다는 그들 중에 100여일 동안 강남역 사거리 철탑 위 허공의 새가 된 김용희씨나, 김용균 이후에도 위험의 외주화로 일터에서 생명을 잃고 있는 하청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 석달 넘게 농성 투쟁을 벌이고 있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분노하는 노동자, 서민은 얼마나 될까. 이러한 상징폭력 현상을 정치인들만 이용하는 건 아니다. 미디어 시장에서 이를 상업화화여 사익을 추구하는 미디어 영업자들이 있고, 이런 분위기에 영합하여 이름값을 높이려는 인사도 적지 않다.

논리적 사유가 작동한다면, 서초동 집회에는 ‘조국 수호’를 외칠 사람만 남고 ‘검찰개혁’을 외칠 사람은 국회로 가야 마땅하다. 그러나 분노는 논리적이지 않다. “조국이 무너지면 문재인이 무너진다”고 비약하고, 노무현을 잃었던 지난날의 울분이 결합되어 두달 전까지 적폐세력 청산의 주역으로 영웅시되었던 검찰은 분노의 화살을 집중적으로 받아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으로 그의 지지자들은 신자유주의 정책까지 성역화하기도 했다. 그의 정책에 대한 비판은 그를 부정하는 것이 되었고 용납되지 않았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대한 부정과 비판도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유일사상만 남은 사회에서 진보정치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고, 진보정치세력은 민주당 안으로 수렴되거나 ‘민주당 2중대’로 전락했고, 그렇지 않으면 노동당처럼 유명무실한 존재로 남았다. 노무현 정권의 철도청장 아래 케이티엑스 노동자들이 겪었던 일을, 문재인 정권의 도로공사 사장 아래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판박이로 겪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구나 말하듯이 검찰개혁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보다 기소배심제 등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법제화하고 권력의 검찰이 아닌 국민의 검찰로 거듭나도록 검찰 내부의 문화와 관행을 혁신해야 가능할 것이다. 곧 줄탁동기다. 촛불이 기대했던 노동·재벌·교육·사법 부문의 개혁은 전망 부재이고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도 진전이 없다. 남북관계 개선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발언에 일희일비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단기적으로 현실정치에 대한 기대를 접은 나는 차라리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산다”는 명제를 붙잡는다. 상징폭력이 만연하고 신자유주의가 정부정책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의 정신까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삼바의 분식회계’ 같은 불법적 탐욕만큼은 ‘법의 권위’로 설 자리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근대 민주공화국을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동선을 목적으로 하며,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국가”라고 규정한다면,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산다”는 명제가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국가”에 일정 정도 부응한다고 할 수 있다. 재벌·사학·정치·언론·종교 등 사회 각 부문에 온갖 불법과 비리, 유착이 난무하는 땅이기에, 아직 우리가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법의 권위라는 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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