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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100억짜리 유령빌딩… 지방재정 줄줄 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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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 전시관 지으며 예산 펑펑

광역단체 투자 심사制 유명무실

"염병할, 즈그들 돈 같으면 저그에 100억원을 들여 저렇게 지어놨겠어?"

50년 넘게 벌교시장에서 장사해왔다는 70대 상인은 시장에서 50보쯤 떨어진 한 건물을 바라보며 얼굴이 벌게져 이렇게 말했다. 지난달 5일 찾아간 전남 보성군 벌교꼬막웰빙센터는 2014년 99억원(국비·군비 각 49억5000만원)을 들여 3층(연면적 2674㎡) 건물로 준공됐다. 그런데 이 건물은 '유령의 집'처럼 변해버렸다. 1~2층은 곳곳이 공실(空室)로 남겨져 빈 폐자재가 나뒹굴었고, 2층 꼬막 전시·홍보 체험관은 9개월 넘게 셔터문이 내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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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찾지 않는 꼬막센터, 창고 같은 내부 - 지난달 5일 찾은 전남 보성군 꼬막웰빙센터(위 사진). 특산물인 꼬막 홍보와 체험, 판매를 위해 100억원을 들여 5년 전 완공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아 빈 건물에 폐자재(아래 사진)만 나뒹군다. /보성=김성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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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지방 재정이 별다른 견제도 받지 않고 샌 전형적인 사례다. 민선 군수(당시 정종해 군수)가 "웰빙센터를 벌교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하겠다"며 의지를 보인 중점 사업이라 '브레이크' 없이 추진됐다. 광역단체인 전남도에서 사업성 여부를 따지는 '투자심사'도 했지만 걸러지지 않았다.

코앞에 벌교시장이 있는데 각종 수산물 등을 판매하는 벌교꼬막웰빙센터를 지으니 상인들은 입점을 외면했다. 사후 사업 평가도 허술하다. 전남도의 보성군 정기 감사에서 "관리를 철저히 하시기 바란다"는 '권고'가 유일했다.

지난 1일 오전 찾아간 전남 구례군 마산면 지리산역사문화관은 지리산 자락을 낀 5만3718㎡ 부지에 번듯한 기와지붕이 얹힌 전시관 세 채(전체 건물 연면적 3495㎡)와 분수 시설, 잔디 광장까지 갖췄다. 올 4월 개관한 이곳은 국비와 군비를 합쳐 총 240억원이 들어갔다. 그런데 이날 오전 내내 관람객은 기자 혼자였다. 산사(山寺)처럼 적막한 이 역사문화관의 연간 관람객은 당초 목표 14만명(하루 약 380명)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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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웅장한데, 하루 방문객 수십명… 대추 모양 화장실이 유일한 볼거리 - 지난 4월 개관한 전남 구례군 마산면 지리산역사문화관. 5만㎡가 넘는 너른 부지에 기와지붕을 얹은 전시관 세 채가 번듯하게 지어져 있다. 그러나 지난 1일 오전 취재진이 찾았을 땐 관람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역사문화관 주변에는 '백두대간 생태교육장' '자연생태 체험학습장' 등 지리산을 소개하는 전시·체험 공간이 마련돼 있어 중복 투자라는 지적을 받는다. 아래 사진은 경북 군위군 '어슬렁 대추정원'. 특산물인 대추를 홍보한다며 19억원을 들여 조성했는데, 대추 모양 화장실이 사실상 공원 시설물의 전부다. /구례=김영근 기자 군위=김성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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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누수(漏水)를 막는 장치도 없는데, 내년도 지방재정 규모는 올해보다 20조원 많은 250조원 시대를 열 전망이다. 김정훈 재정정책연구원 원장은 "지자체 재정 운영을 감시할 워치도그(Watch Dog·파수꾼)가 사실상 전무하다"며 "지방재정은 자꾸 불어나는데 혈세가 별다른 통제 없이 줄줄 새고 있다"고 말했다.

◇허술한 예산 편성에 무책임한 집행

지리산역사문화관은 예산 편성이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주변에 '백두대간 생태교육장' '자연생태 체험학습장' '야생화 생태공원' 등 지리산을 소개하는 다른 전시·체험 공간이 수두룩했다. 지리산역사문화관에서 200m쯤 떨어진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총사업비 100억원)'에는 인터넷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지리산 사진과 백두대간 동물 소개 자료 등이 전시돼 있었다. 구례군은 기존 '자연생태 체험학습장'이 있는데도, 비슷한 '야생화 생태공원'을 257억원 들여 또 만들기도 했다. 이 공원 이용객 역시 하루 평균 35명에 불과(구례군 감사 결과)하다.

지난 1일 오후에 찾은 경북 군위군 '어슬렁 대추정원'도 썰렁했다. 군위군이 지역 특산물인 대추를 홍보하기 위해 사업비 19억원을 들여 9142㎡ 규모의 공원을 조성했지만, 논밭 한가운데 세워져 마땅한 볼거리도 없다. 눈길 끄는 시설이라곤 7억원이나 들여 만든 대추 모양의 거대한 화장실뿐이었다. 주민 김모(57)씨는 "현대식 화장실에 음악까지 좔좔 나오니 좋긴 하지만,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주민들 사이 '돈 썩었다'는 말이 나온다"고 했다. 군위군 관계자는 "당초엔 지역 특산물인 대추를 알리려고 조형물만 세우려 했는데, '주변에 화장실이 없다'는 말이 나와 화장실로 바꾼 것으로 안다"고 했다.

허술하게 사업 예산이 편성되면 집행 단계에선 걸림돌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선출직 단체장이 예산회계 공무원을 임명하는 현 체제에서 단체장의 부당 압력이 작용할 여지가 여전히 많다"(감사연구원 보고서)는 분석이 나온다.

◇사후 평가나 지방의회 견제도 부족

지방재정 누수(漏水)가 반복되는 원인으로 '사후 평가 부실'을 꼽는 지적도 많다. 전문가들은 "지방의 경우 국비를 따와 신규 사업을 새로 추진하고 홍보하는 데에만 열중하지, 이후 사업 집행을 바로잡거나 반성하는 '평가' 단계가 너무 부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지리산역사문화관은 240억원을 이미 쏟아부어 놓고도 "콘텐츠가 부실하다"는 지적을 받자, 추가로 17억원을 부어 압화(꽃과 잎을 눌러서 만든 그림) 등 전시물 보강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이 역시 인근에 있는 한국압화박물관과 중복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지방자치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는 지방재정 감시 역할을 못 하고 있다. 행안부는 작년 2월 '시도별 예산 바로 쓰기 감시단 구성한다'는 제목의 보도 자료를 내고, "예산 낭비 신고 사례를 '지방재정 365'(지방재정통합공개시스템) 홈페이지에 공개해 예산 낭비를 막을 타산지석으로 삼겠다"고 했으나, 지금껏 예산 낭비 사례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행안부는 "예산 낭비 취합 사례가 많지 않고 준비 기간이 더 필요하다"고 해명할 뿐이다.

행정부인 지자체를 견제해야 할 지방의회도 제 기능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이태석 KDI 공공경제연구부장은 "자치단체장과 같은 정당 소속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방의회가 지방 권력을 감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보성·구례·군위=김성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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