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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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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가을귀]하워드 휴즈를 품어야 신기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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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경제연구소 김은환 실장 '산업혁명의 숨은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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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에비에이터(2004년)’에서 하워드 휴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신형 비행기를 점검한다. 오른손으로 기체 옆면을 어루만지며 강판 각도와 나사 상태를 확인한다. 그는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직원을 호출한다. "아직 부족해. 표면처럼 완전히 평평해야 한다고. 나사와 이음새도 전부 납작해야 하고. 기체에 바람의 저항이 있으면 안 돼. 완벽해야 한다고.“


굳은 인상은 또 다른 직원 잭 파이어(대니 휴스턴)의 요청을 들으면서 조금씩 펴진다. "새로운 현대식 비행기가 필요합니다. 좌석 50개에 최고 고도 1만2000피트에서 날 수 있는 모델이요." "2만피트는 어떻겠어요?" "난기류 영향을 덜 받겠죠." "날씨에 관계없이 비행하는 거예요. 미국인의 1%만이 민간 항공기를 이용합니다. 7000피트에서는 기체가 너무 흔들리잖아요. 날씨를 넘어서는 비행기를 만들어서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을 안전하게 태우자고요. 아성층권(대류권계면보다 조금 아래)을 통해 전국은 물론 세계를 횡단하는 거죠. 그게 바로 미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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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즈는 사무실을 지키는 비즈니스맨이 아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파일럿이었다. 그가 제작한 영화 '지옥의 천사들(1930년)‘에는 실제 전투기를 사용한 공중전 장면이 나온다. 촬영을 하면서 조종사 세 명이 사망했다. 휴즈도 직접 비행기를 몰다가 추락해 뺨 부분이 함몰됐다.


그는 다시 도전했다. 항공기 제조업에 뛰어들어 자기가 조종할 비행기를 만들었다. 경주용 비행기 'H-1 레이서'가 대표적이다. 휴즈는 이 비행기를 타고 시속 563㎞로 날아가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다. 10시간이 넘던 북미 대륙횡단 기록 또한 9시간27분10초로 경신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발간한 '산업혁명의 숨은 주역들'은 휴즈의 모험정신에 주목한다. 하늘을 나는 속도광의 성향이 아니라 사업가와 기술자, 투자자로서 쉬지 않고 아찔한 속도감을 즐기는 모험적 기질이다. 그는 여러 번 실패를 맛봤다. 거대 수송기 'H-4 허큘리스'의 경우 성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도 적극적인 로비를 벌여 프로젝트를 완성될 때까지로 기간을 연장시켰다. 책정된 예산 1800만달러가 소진되자 사재 700만달러를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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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즈는 떼돈을 벌기보다 한층 빼어난 성능의 비행기를 만들고자 했다. 계약금 1800만달러는 개발자의 이익을 감안하지 않은 액수였다. 그 또한 액수에 연연하지 않았다. 당시는 전시였기에 전략자원으로 분류된 강철과 알루미늄 사용이 제한됐다. 휴즈는 수송기가 우선 순위에서 밀려 자재 확보가 곤란해졌으나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목재로 기체를 제작하겠다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국가에 부담을 끼치지 않고 헌신하려는 애국심의 발로라고 할 수도 있지만, 불리한 조건이 그의 승부사 기질을 자극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실행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를 동기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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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에이터의 클라이맥스는 상원의원 오언 브루스터(알란 알다)가 휴즈에 대한 비난 여론을 등에 업고 허큘리스 프로젝트에 대한 의회 청문회를 진행하는 시퀀스다. 휴즈는 국가예산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단 한 푼의 유용도 없었고 오히려 적지 않은 사재를 쏟아부었다고 항변한다. 아울러 이 비행기가 전시에 활용되지 못했지만 미국의 항공 기술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규모의 한계를 극복한 의미 있는 성과였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리 칭찬받지 못할 일들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변덕스럽고 바람둥이, 때로는 괴짜라고 불렸죠. 그러나 나는 거짓말쟁이라는 말은 듣지 않았어요. 말할 필요도 없이 허큘리스는 기념비적인 사업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 가운데 가장 큰 비행기죠. 4층 건물 높이에 축구장보다 더 긴 날개를 가졌습니다. 도시의 한 블록보다도 큽니다. 내 인생의 모든 땀, 내 모든 평판을 여기에 쏟아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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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즈를 두고 한 점 흠 없는 혁신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대(對)정부 계약을 이행하지 못했으며, 군 관계자에게 부적절한 향응을 제공하는 불미스러운 일도 벌였다. 하지만 그는 늘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냈고 대담하게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허큘리스급 거대 항공기를 이륙시키는 일은 애초 무리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어떤 혁신도 사전에 무리한지 또는 가능한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허큘리스는 1947년 11월2일 휴즈의 조종 아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떠올랐다. 물 위에서 21m쯤 떠올라 1.6㎞를 날았다. 휴즈는 몰려든 기자들에게 "실험은 성공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미국 사회는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낭비된 국가 예산보다 대담한 시도에 더 큰 가치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포트맥 강가에서 새뮤얼 랭글리가 시험비행한 이래 미국은 혁신가들의 시도를, 그리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목격해왔다. 미국의 혁신 역사는 실패로 점철돼 있다. 하지만 이 나라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실패에 대처하는 방식을 성숙시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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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혁신가가 아이디어를 내고 개발한다. 혁신가는 무대 위의 공연자이고, 정부와 대중 등으로 이뤄진 사회는 관객과 같다. 이때 관객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혁신의 또 다른 파트너다. 사회는 혁신가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혁신가를 '인큐베이터에서 보호 받아야 하는 미숙아'라고 칭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은 우리에게 필요한 시각이다.


"기존의 지배적 기술은 신기술을 일종의 병원균으로 취급하고 제거하려 한다. 외부 조력 없이는 신기술을 살릴 길이 없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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