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해석부터 고증 비화까지 담아
전북 익산의 미륵사탑과 쌍릉, 두 유적을 세운 주역으로 전해지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는 왜 후대로 갈수록 더 유명해졌을까. 학자들이 끊임없이 실체를 놓고 입씨름하는 배경은 뭘까.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장을 지낸 이병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의 신간 <백제 왕도 익산, 그 미완의 꿈>(책과함께)은 궁금증을 조목조목 풀어준다. 책은 무왕 천도설이 전해지는 백제 고도 익산 유적들을 놓고 지난 100여년간 역사학자들 사이에 이어져온 발굴, 해석의 역사를 갈무리한다. 방대한 내용을 꿰는 열쇳말은 ‘반전’.
1910년 처음 익산에서 근대식 조사를 벌인 일본 학자 세키노 다다시는 쌍릉을 백제보다 앞선 마한의 무덤으로 믿었다. 국내 최고 최대의 탑으로 공인된 미륵사탑은 백제 멸망 뒤 고구려 유민들이 익산에 세운 보덕국의 탑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1917년 제자 야쓰이 세이이쓰의 쌍릉 석실 발굴로 백제 왕릉임이 드러났고, 해방 뒤 미륵사터 발굴로 세키노의 주장은 산산조각났다. 국립전주박물관이 2015년 야쓰이의 쌍릉 발굴에 대한 보고서를 거의 100년 만에 내면서 쌍릉 중 하나인 대왕릉 주인이 선화공주였을 것이란 견해를 내자, 곧장 익산시가 재발굴을 주도해 지난해 대왕릉 석실 안 유골이 무왕임을 확증한 과정도 놀라운 반전 드라마였다. 20년간의 공사를 거쳐 올해 4월 다시 자태를 드러낸 미륵사터 동탑의 보수, 원형 고증을 둘러싼 역경과 백제의 궁궐 생활상을 처음 드러낸 왕궁리 궁터 발굴에 얽힌 반전 비화들도 정리했다. 예상치 못한 유물, 문헌 발굴로 통설을 뒤집어온 익산의 발굴사는 정치와 언론까지 가세하면서 21세기 문화유산 보존 원칙에 대한 담론을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어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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