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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인들, 패망 후 200년간 ‘발해 정신’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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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 발해 유민사 조명

926년 멸망한 발해 주민들 수백년간 거란-요나라에 저항

금나라서는 고위관직 지내기도

동아일보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오랫동안 부흥운동을 펼쳤던 발해 유민의 역사를 다룬 연구서가 발간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은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었던 발해가 926년 거란의 침입을 받고 멸망한 뒤 유민의 동향을 담은 ‘새롭게 본 발해 유민사’(1만5000원·사진)를 최근 펴냈다.

편찬 책임자인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뒤 세운 동단국(東丹國)을 조명했다. 동단국은 설립 직후부터 발해인의 계속된 저항을 받았다. 이에 우차상(右次相·고위 관직의 하나) 야율우지가 “남은 무리(발해 유민)가 조금씩 번식하면 아마도 후환이 될 것(遺種浸以蕃息 恐爲後患)”이라고 건의했고, 동단국은 928년 요양(랴오양·遼陽) 지역으로 옮겨졌다. 임 연구위원은 “이를 거부한 발해 주민들이 고려와 여진으로 달아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발해가 멸망한 지 200년 가까이 지나서도 발해인들은 반요(反遼) 투쟁을 벌였다. 요나라 때 발해인의 성격을 검토한 나영남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1115년 금의 건국에 자극받은 고욕이 요나라에 반란을 일으켰고, 이듬해에는 고영창이 대발해 황제를 칭하고 한때 요동의 50여 개 주를 함락시키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금나라에서 발해인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사서에 ‘요양발해인’으로 기록된 장호(?∼1162)는 금 태조부터 무려 5명의 황제 아래에서 관료로 일했고 남양군왕 등의 작위를 받기도 했다. 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는 “고위 관직을 지낸 이들의 수와 봉작(封爵) 측면에서 발해인들은 금 조정에 상당한 족적을 남겼다”고 했다.

황인규 동국대 교수는 승려와 신도, 사원과 유적으로 나누어 발해 유민이 문화적 정체성을 지켰던 ‘발해 불교’의 흔적을 조명했다.

임상선 연구위원에 따르면 중국 학계가 발해를 자신의 역사로 간주한 건 오늘날 ‘국민’의 개념에 가까운 ‘중화민족’을 주장하면서부터다. 임 연구위원은 “발해 유민은 발해 멸망 이후 약 200년간 어디에 살건 거란인, 송(宋)인, 고려인이 아니라 발해인으로 자칭했고 그렇게 분류됐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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