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기를 안 먹기로 한 거야?’라는 비거니즘(동물성 제품을 섭취하지 않는 식습관 및 철학) 관련 책을 쓴 마르탱 파주의 말입니다. 그가 비건이 되기 전 채식에 대한 편견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죠.
그는 자신의 편견을 깬 채식메뉴를 자세히 소개합니다. “채식주의자인 친구 달리보르는 애피타이저로 해초를 곁들인 흰 강낭콩 다진 요리와 귀리 크림이 들어간 호박수프를, 주요리로 밀고기(세이탄)와 절인 채소, 렌틸콩과 코코넛밀크를 넣은 달 커리(카레)와 치즈를 내왔다. 디저트는 복숭아 파이였다. 굉장히 푸짐하고 맛있는 식사였다.”
저 역시 얼마 전 마르탱 파주 작가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비건인 친한 언니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출출하다는 말에 뚝딱뚝딱 야식을 만들던 언니는 ‘비건 부리또’를 내왔습니다. 고기가 안 들어간다는 이유로 기대를 안 했는데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자극적인 고추의 매운 맛과 새콤한 소이마요 소스가 버무려진 신선한 재료의 맛, 고기와 비슷한 식감을 내는 버섯의 쫄깃함까지 ‘채식은 맛이 없을거야’라는 편견이 완전히 깨져버린 계기였습니다.
비건의 삶이 궁금해졌습니다. 검색을 해보니 집 근처만 해도 비건 가게들이 꽤 있더군요. 생각보다 비건 음식의 범위는 넓었습니다. 비건 스테이크, 비건 라면, 비건 버거, 비건 케이크, 비건 요거트, 비건 술 등등 주식부터 디저트까지 일상의 식단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단지 동물성 제품인 ‘고기’가 제외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이죠. 앞서 먹어본 비건 부리또에서 이미 채식이 맛이 없다는 편견은 깨졌지만 논비건(Non-vegan)이 비건 가게들을 들어갈 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이미 일상 속에 스며든 비건은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란 것을.
◇비건은 풀만 먹을 것 같다고요? 달달한 케이크와 맛있는 버거도 즐겨 먹어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두부 크림으로 만든 진한 글루텐프리 더블초코케이크와 두유와 현미,흑임자 가루로 만든 흑임자소보로파운드···’ 다소 푸석푸석한 식감이(물이나 음료 필수) 약간 아쉽지만 적당히 단 맛과 느끼함 없이 깔끔한 뒷맛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이 메뉴들. 비건 재료를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고객들 중 20% 정도만 비건 고객들이라는 이곳의 대표메뉴입니다.
비건 베이킹랩 ‘비건빌리지’는 식물성 재료만을 사용하는 베이킹 클래스의 장이자 비건 빵과 비건 케이크를 판매하는 작은 공간입니다. 이경진(29) 대표는 논비건에게도 맛있는 비건 빵을 만들 수 있다는 일념으로 회사도 그만두고 창업에 도전했다고 합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불규칙하게 식사하고 외부 음식을 먹다 보니 건강이 나빠짐을 느꼈어요. 젊을 때 건강을 챙겨보려고 5개월 동안 바디프로필을 찍자는 목표로 식단과 운동관리를 했어요.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빵이 있지 않을까해서 고민하던 차에 사 먹던 빵은 정보를 제대로 알기 어려워서 직접 책도 찾아보고 레시피를 만들면서 빵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이 대표는 다양한 수요를 반영하기 위해 비건클래스와 글루텐프리(글루텐 성분이 없는 현미가루 등을 사용)클래스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하며 택배로 주문한 고객들에게는 일일이 포장에 어떤 재료와 성분으로 되어있는지 붙여 알리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비건이 유행이라 많이들 찾으시는데 보통 비건 빵이라고 하면 맛없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한번 맛을 보고 오히려 왜 맛있는지 묻기도 하시고 이게 비건이냐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어요. 물론 달걀과 버터가 나쁘다고 무조건 비건만을 고집하지는 않아요. 다만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의 경우 단가를 낮추기 위해 값싸고 질이 떨어지는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히 건강한 빵을 만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고기가 안 들어가기 때문에 ‘햄버거’라는 말 대신 ‘비건버거’라는 말을 쓰는 곳. 비건음식 중에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는 없을까 하다가 알게된 ‘하이미소’라는 곳입니다. 논비건의 입장으로서 고기 식감을 느낄 수 있는 채식도 경험해보고 싶었죠. 버거에 고기 패티 대신 쌀 패티를 넣고 밀가루 빵 대신 현미 가루 빵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가게의 대표 메뉴인 ‘현미버거’의 쌀패티는 고기패티와 치킨패티의 중간 식감쯤으로 느껴졌습니다. 두께가 두껍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반 햄버거처럼 포만감을 느끼기엔 충분했습니다. 아무 말 안 하고 먹으면 크게 거부감 없이 누구나 먹을 수 있을만한 버거였죠. 버섯, 고구마, 샐러드, 비건치즈 등 다양한 토핑의 버거로도 즐길 수 있습니다. 가격 역시 4,000~5,000원 수준으로 일반 버거와 큰 차이 없습니다.
특히 덜 익거나 오염된 고기패티로 인해 발생한 햄버거병 사건 이후 학부모들의 관심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아이들 건강을 위해 학교 간식으로 많이 주문이 들어온다는군요. 올해 9월 초에는 서울시교육청과 은평구청 자원봉사센터의 연계로 연신중학교 학생들에게 비건에 대한 이해와 비건 음식과 일반 음식의 비교,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교육도 진행했다고 합니다. 하이미소 구건모 본부장(53)은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버거는 더 이상 정크푸드가 아니고 영양소를 고루 갖춘 웰빙푸드”라고 강조했습니다.
◇힙한 비건의 성지, 해방촌 비건 로드를 아시나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아무스 부시, 토끼의 사찰, 속세의 유혹, 달콤한 귀농···’
범상치 않은 이름의 메뉴들은 순식물성 재료들로만 만들어진 코스 요리의 음식들입니다. 100% 예약제로만 손님을 받는, 비건들 사이에서는 이미 힙하다고 소문난 ‘소식’은 서울 용산구 해방촌 비건로드의 대표 레스토랑입니다.
해방촌 오르막길 동물해방물결 사무실 옆 테이블 4개의 소규모 공간으로 이루어진 이 곳은 ‘속세의 사찰’이라는 컨셉을 내세운 사찰음식의 철학을 고집하는 식당이죠. 2030을 겨냥한 트렌디한 비건 한식, 사찰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안백린(26) 대표는 미국에서 신학을 전공한, 불교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본인을 소개했습니다. 안 대표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음식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고 공부를 하면서 동물의 고통은 철저히 배제된 채 동물을 수익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후 한국에 들어와 한국 로컬 재료를 재해석한 ‘섹시한 비건 음식’을 만들어보자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팝업스토어로 시작한 가게가 예상보다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9개월째 운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식물성으로만 구성됐다는 메뉴판의 재료를 보고 ‘과연 배는 부를까?’ 걱정했는데 아몬드 리코타가 올라간 구운 가지, 대체육인 ‘비욘드미트’와 더덕구이처럼 매콤달콤한 당근과 야생초들, 갈비 양념이 발라져 고기와 비슷한 식감이지만 더 부드러운 콩갈비, 디저트로 쑥과 초콜릿 테린느까지 어느 고급 레스토랑과 다를 것 없이 적당히 배부른 코스였습니다. 장을 제외한 모든 음식 재료를 가게에서 직접 만들고 유기농 재료를 써서 가격이 저렴한 편은 아니고, 좁은 공간에 좌식으로 앉아 먹어야 한다는 점 빼고는 왜 인기가 있는지 알만한 곳이었죠.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비건스페이스’는 해방촌에 위치한 대한민국 1호 비건 식료품 전문점입니다. 이태원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소문난 곳이라 내국인보다 외국인 고객 비율이 훨씬 높다는 곳이죠. 비건은 아니지만 요즘 늘고 있는 비건 인구 증가 가능성을 보고 비건 사업을 시작했다는 사장님이 한국어와 영어 동시로 고객들에게 서비스하며 제품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곳입니다. 채식라면과 채식 짜장면 같은 레트로트 식품부터 콩고기, 비건치즈, 비건와인, 소이마요 등 웬만한 음식들에 적용할 수 있는 재료들까지 다양한 것을 취급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비건 콘돔과 비건 생리컵 등 변화하는 비건 인구에 맞춰 제품을 들여오는 성인용품점도 생겼습니다. 외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피우다’가 그곳인데요. 성과 관련된 물품이 이제는 많은 체인점을 낼 정도로 개방화되고 있는 가운데 본인이 여성이라 더 몸에 좋은 제품을 들여오고 싶었다고 합니다. 재활용 가능한 섹스토이나 옥수수 전분으로 만들었다는 우머나이저 같은 곳을 만드는 회사들이 ‘비건 제품’이라 홍보하고 있지만 정확히 ‘인증’되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정확히 인증된 비건 제품들만 골라서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들어가서 구경하고 설명만 들어도 재밌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가까워진 비건, ‘열풍’에서 하나의 ‘시장’이 되다
과거에 비해 소비자들이 비건을 접하기는 훨씬 쉬워졌습니다. ‘채식한끼’라는 앱은 근처에 있는 채식 전문점 가게를 소개해주고 비건편의점 ‘wiki’라는 사이트는 비건성분표와 비거니즘 지형도를 구성해 비건 식당들의 위치를 알려줍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비거니즘일기 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비건 운동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한국채식연합은 국내 비건 인구를 2019년 기준 약 150만~20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육류, 어류, 유제품 등을 일체 먹지 않는 극단적 채식 인구는 약 50만~7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채식 전문점은 전국에 약 350~400개로 10년 전보다 2배 이상 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빠르게 증가 중인 비건 소비자들을 위하여 각종 유통업계들도 비건을 위한 식품들을 출시하고 있습니다. 동물을 제외한 콩이나 쌀 등의 식물성 재료로 대체육을 만들기도 하고 비건 옵션을 메뉴에 넣어 선보이는 가게도 늘고 있죠.
한경식 삼육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고기에 우수한 단백질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콩과 곡류 등의 식물성 원료를 골고루 잘 섭취하면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도 건강상으로 문제 될 것은 없다”면서 “다양한 식물성 원료를 혼합하여 더 영양이 풍부한 대체육을 개발 중이고 늦어도 내후년까지는 출시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대체육을 개발해 빠르게 성장 중인 식료품 회사 ‘비욘드 미트’가 상장기업으로 등록돼 다양한 동물 대체 식품을 개발 중입니다. 또 유기농 전문 매장 ‘트레이더조’, ‘홀푸드마켓’ 등은 매장을 늘려나가며 비건 소비자들을 사로 잡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비건이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매장 혹은 식당은 제한적입니다. 대학생 김서연(24)씨는 “비건이 되기로 결심한 뒤 한국에서 식품이나 의류를 살 때 한참동안 제품 성분표를 들여다볼 때가 많다”며 “뷔페에 가서 토마토 파스타에 동물성 재료가 들어가는지 물어봤더니 잘 모르겠다는 답을 들었다. 비건을 위한 선택지가 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국회에서는 녹색당이 공공급식에서 비육류를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라며 ‘채식선택권’ 헌법소원을 낼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법도 중요하지만 채식주의자들을 예민하거나 이상하다고만 바라보는 문화도 함께 바꿔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신혜인턴기자 happysh0403@sedaily.com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