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 빅데이터로 본 텅 빈 서울 ‘연휴의 재구성’
지난해 추석 연휴 서울 사람들의 이동 빅데이터 분석. 그래픽=신재민·심정보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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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휴가 내고 아이와 놀이동산 가기.
12일:휴식.
13일:아이와 민속촌 가기.
14일:휴식.
수도권에 사는 직장인 이진호(35) 씨의 이번 추석 연휴 계획표다. 부모님이 충청도에 계시지만 이번에 찾아뵙지 않고 다가오는 제사 때 가기로 했다. 이 씨는 “부모님께서 인근에 사는 친척들과 명절을 보낸다고 우리는 내려오지 말고 쉬라고 하셨다”며 “제사 때 주말을 이용해 친척들이 모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추석을 맞아 전국 고속도로는 서울을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붐빈다. 한국교통연구원이 추정한 이번 연휴 기간 예상 이동 인원은 3356만명. 하지만 이동인원 모두가 연휴 내내 고향에서 가족·친지와 시간을 보내지는 않는다. 수년 전부터 전통적 의미의 추석은 당일로 압축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을 위한 휴가로 활용하는 이들이 많아져서다. 이 씨처럼 교통이 혼잡한 추석 연휴 기간은 아예 휴가로 보내고 ‘추석 행사’는 다른 일반 주말에 몰아서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그렇다면 연휴 기간 고향에 가지 않고 서울에 있거나 아주 잠깐 고향에 다녀오는 이들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중앙일보는 카카오모빌리티와 함께 지난해 추석 연휴(2018년 9월 21일~9월 26일, 추석 당일은 24일)기간 ‘카카오내비’(회원 수 1600만명), ‘카카오 T 택시’(회원 수 2300만명) 이용자 중 서울에서 출발해 수도권(서울·경기·인천)으로 간 이들의 이동 데이터를 심층분석했다. 이른바 ‘ 남은 자들의 연휴 재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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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전날은 ‘불금’ 뺨친다
추석 황금연휴를 앞두고 인천공항 출국장이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다. 장진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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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대학생 김형진(22) 씨는 올해 추석 연휴 시작 전날인 11일 저녁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을 같이할 계획이다. 수년 전만 해도 김 씨는 추석 전날이면 서울에서 차를 타고 출발해 할아버지가 계시는 거제도와 외가가 있는 부산에 내려가 1주일씩 머물다 올라오곤 했다. 모이는 친척 수만 20명이 넘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수험 생활을 이유로 내려가지 않은 뒤부터 추석 귀성은 사라졌다. 그는 “부모님도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되셔서 이제 추석이라고 꼭 내려가야 한다 생각하지 않으시고 필요하면 다른 주말에 내려가신다”며 “연휴 기간 중 추석 당일은 부모님과 형, 나 이렇게 4명이 영화 한 편 보고 밥을 먹는 등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머지 시간은 나 혼자만의 휴가로 쓴다”고 말했다.
술집 이동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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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내비 길 안내 빅데이터에는 김 씨처럼 명절을 보내는 이들이 많아졌음을 추정케 하는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11개 주요 업종을 뽑아 연휴 기간 길 안내 절대 건수를 업종 내에서 비교한 결과 노래방은 연휴 시작 직전 날(9월 21일) 오후 8시에 가장 찾는 사람이 많았다. 술집은 같은 날 오후 9시, 유흥 시설은 다음 날로 이어지는 자정에 길 안내 수요가 몰렸다. 마치 ‘불금’을 보내듯 연휴 전날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러 나오거나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다.
카카오 T 택시 이동 데이터도 비슷했다. 택시를 이용해 노래방을 가는 사람은 연휴 시작 직전 날 오후 10시에 가장 많았으며 술집은 다음 날 오후 10시, 유흥시설은 2시간 뒤인 자정에 가장 호출이 많이 몰렸다.
이재호 카카오모빌리티 디지털경제연구소장은 “올해 설 연휴가 시작됐던 1월 31일 카카오 T 대리 호출량이 평소 대비 32% 늘었다”며 “명절, 징검다리 연휴와 같은 긴 휴가를 앞둔 평일 저녁에는 평소 만나고 싶었지만, 시간이 안 맞아 보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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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첫날엔 골프장, 대형마트·백화점 붐벼
골프장은 연휴 첫날(9월 22일) 새벽 가장 많은 사람이 카카오내비로 찾아간 목적지다. 추석이 이틀 남아 여유가 있는 만큼 골프 등 취미 생활을 즐긴 이들이 많았단 얘기다. 학원은 같은 날 오후 1시에 목적지로 선택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오후가 지나면서 점점 명절을 준비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형마트와 백화점을 목적지로 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시간은 같은 날 오후 3시였다.
요양원 이동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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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계신 요양시설 방문은 추석 당일
부모님 등을 모시고 있는 요양 시설을 찾는 이들이 가장 많이 몰린 시간은 추석 당일(9월 24일) 오전 11시였다. 택시를 이용한 사람도 같은 시간 요양원에 간 사람이 가장 많았다. 하지만 명절 분위기는 잠깐이었다.
당일 오후 1시부터는 호텔 등 숙박시설을 찾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다음날(9월 25일) 12시에는 관광·명소의 검색량이 늘었고 오후 3시에는 영화관을 찾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 분석을 주도한 카카오모빌리티 모빌리티인텔리전스연구소 김정민 연구원은 “추석 전 하루와 추석 당일 정도를 명절로 인식하고, 다른 날은 명절이라기보단 연휴로 인식하는 게 최근의 두드러진 경향”이라며 “당일 오후부턴 ‘호캉스’를 떠나거나 관광지·영화관을 찾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많아진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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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추석 대세는 ‘압축 추석’
관광/명소 이동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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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에서 자취하는 직장인 전 모(33) 씨는 지난해 추석 가족 행사를 압축적으로 보냈다. 연휴 시작 전날엔 친구들을 만나 술자리를 가졌다. 이후 자취방에서 쉬다가 추석 당일 오전 강동구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갔다. 할머니 댁에서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부모님과 만나 식사한 뒤 오후에는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남은 시간은 책을 읽으며 개인 시간을 가졌다.
올해도 부모님, 친척과 보내는 시간은 가급적 추석 당일 하루로 압축할 생각이다. 전 씨는 “어렸을 적엔 연휴 내내 추석 행사가 이어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퍼즐 조각 빠지듯 동년배 사촌들이 빠지면서 친척들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며 “지금은 나도 의무적 추석 행사는 당일에 몰아서 하고 나머지는 내 시간으로 활용하는 게 편하다”고 말했다.
전 씨처럼 추석 당일 외엔 나머지 연휴 기간을 휴일로 활용하는 경향성은 평상시(2018년 4월 한 달간) 대비 연휴 기간 길 안내 증가량 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휴 첫날(9월 22일)에는 관광지 부속시설, 낚시, 테니스, 체조·펜싱 등 체육시설, 취미 시설, 상설할인매장 등에 평상시 대비 많은 사람이 방문했다. 묘지 등 장례시설, 요양·간병 시설 등은 10위권 밖이었다.
하지만 추석 전날(23일)엔 장례시설과 요양·간병 시설이 10위권 내로 올라섰으며 추석 당일(24일)엔 요양·간병시설과 장례시설이 최상위권으로 올라섰다. 추석 다음 날엔 다시 10위권 밖으로 밀렸다. 대신 관광지 부속시설, 체험 여행, 관광명소가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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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벨' 세대 당일만 추석 경향 가속화
지난해 추석 연휴기간 사람들이 많이 찾은 곳. 그래픽=신재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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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추석 연휴 기간 내비게이션으로 가장 많이 방문한 곳 조사에서는 인천국제공항터미널이 1위, 김포공항 국내선이 2위, 서울역이 3위로 나왔다. 스타필드 하남, 현대프리미엄 아울렛 김포점, 스타필드 고양도 10위권에 들었다. 같은 기간 택시로 가장 많이 간 곳은 서울역이었다. 용산역, 김포공항 국내선 등이 뒤를 이었다. 평상시에도 특정 장소 기준으로 순위를 정할 경우 공항과 대형 쇼핑센터가 가장 많이 방문한 곳 상위권에 오른다.
지난해 추석 명절 연휴 첫날인 9월 22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울역 플랫폼에서 귀성객들이 열차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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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하루만 실제 추석 행사에 보내는 이 같은 ‘압축 추석’ 경향이 최근의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 분위기와 맞물려 더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사회학)의 설명이다.
“워라벨을 체화한 현 젊은 세대 입장에선 친족 전체가 모인 추석 명절 행사도 이를테면 ‘일’(워킹)의 연장 선상이라 볼 수 있다. 특히 가족 내 ‘며느리’ 역할을 담당하는 여성들에게 대가족제 내에서 명절은 일종의 ‘사역’이다. 남성들도 그런 아내를 보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고 갈등이 반복되면서 점점 고유한 방식으로 명절을 보내는 시간은 추석 연휴 기간에서 계속 축소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연휴 기간이 얼마나 길어지든 간에 당일 오전 또는 길어야 하루 정도가 전통적 의미의 ‘명절’로 여겨지는 경향이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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