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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교과서부터 성경까지… 107년 인쇄기업 '보진재' 문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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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청년' 등 일제시대 잡지와 1970년대 대학예비고사 시험지

전 세계 성경 30% 인쇄한 기업… 경영 악화로 인쇄 사업서 철수

출판계 '남의 일 아니다' 뒤숭숭

"박물관 형태로라도 남아주길"

1912년 창업해 현존 국내 인쇄 기업 중 가장 오래된 '보진재(寶晉齋)'가 경영 악화로 문을 닫는다. 김정선(68) 보진재 대표는 10일 본지 통화에서 "인쇄 사업에서 철수한다. 11월 말부터 신규 수주를 중단하고, 기존에 맡아 놓은 물량만 마무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보진재는 지난 3일 경기 파주시 출판단지에 있는 인쇄공장과 토지를 145억원에 처분하는 계약을 했다. 다음 달 18일 주주총회에서 인쇄공장 및 부동산 매각 안건을 처리할 예정이다. 주주총회에서 안건이 통과되면 12월 초 매각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인쇄공장을 판 뒤 사업구조를 어떻게 재편할지에 대해서는 정해진 게 없다"면서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며 긴 한숨을 쉬었다.

4대 107년을 이어온 家業 끝나

보진재는 김정선 대표의 증조부인 김진환(1874~1938) 창업주로부터 4대째 가업을 이어왔다. 1912년 8월 15일 서울 종로에서 처음 인쇄기를 돌렸다. 대한제국 학부(學部)에서 교과서 편찬 업무를 맡았던 김진환 창업주는 망국의 비운을 겪은 뒤 공직을 그만두고 지금의 광화문 우체국 옆 골목에 '보진재 석판인쇄소'를 열었다. '보진재'라는 이름은 창업주가 흠모하던 북송(北宋)의 서화가 미불(米芾)의 서재 이름에서 따왔다.

조선일보

1912년 창업한 인쇄기업 보진재가 오는 11월 문을 닫는다. 왼쪽 위 사진은 2013년 파주 인쇄공장 내부 모습. 1913년 한글 습자본 '언문서첩'과 1925년 인쇄한 찬송가(오른쪽 위), 1950년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과서(아래) 등을 인쇄했고, 한때 세계 성경의 30%를 찍기도 했다. /조선일보 DB·보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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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정서가 강했던 창업주는 첫 인쇄물로 보성고보 졸업증서와 한글 연습을 위한 '언문서첩'을 냈다. '문장' '청년' 등 일제하 지성의 무대였던 잡지들 역시 이곳에서 인쇄돼 나왔다. 단색 인쇄물밖에 만들 수 없는 돌출 활판 인쇄와는 달리, 석판인쇄소라 당시로선 드물게 컬러 인쇄가 가능해 일감이 많이 몰렸다. 김정선 대표는 지난 2012년 창립 100주년 기념 본지 인터뷰에서 "컬러 인쇄 전문이다 보니 책 표지나 서화집을 많이 했다. 그래서 오히려 일제 탄압을 피해 살아남은 측면도 있다"고 했다.

1924년에는 민간 기업 최초로 오프셋 인쇄(간접인쇄) 기기를 도입했다. 1933년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인쇄한 곳도 이곳이다. 1938년 조선일보가 독자 사은품으로 만든 '8색 세계지도'도 보진재에서 찍었다. 교육 분야도 주요 사업 부문이었다. 철수와 영희, 바둑이가 등장했던 1950~60년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과서를 인쇄했고, 1970년대 대학입학 예비고사 문제지도 인쇄했다. 얇은 종이에 찍는 성경 인쇄 기술은 독보적이라, 한때 전 세계 성경 30%를 인쇄하기도 했다. 1996년 인쇄업계 최초로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가 2005년 상장 폐지했다.

인쇄업 불황으로 10년째 적자 지속

100년간 마르지 않았던 보진재의 잉크도 출판·인쇄업 불황이라는 흐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보진재 관계자는 "인쇄업 불황으로 적자가 계속된 것이 폐업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했다. 한 출판인은 "지난 10년간 종이값, 제본비 같은 다른 제작 비용은 올랐는데 인쇄 단가는 거의 오르지 않았다"면서 "중국 등 해외에서 인쇄를 대량으로 해 저가로 찍어 들여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업체 간 경쟁이 심해 단가를 올리지 못했다"고 했다. 전자책이 유행하면서 종이책 수요가 줄어든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보진재는 올해 상반기 매출 46억원에 영업적자 4억원을 냈다. 지난해 매출은 82억원에 영업손실은 9억원이었다. 2009년부터 10년 연속 적자 행진이다.

보진재 폐업 소식에 출판계는 "남의 일이 아니다"라며 뒤숭숭했다. 윤철호 대한출판문화협회장은 "우리나라 인쇄업의 상징인 보진재가 문을 닫다니 안타깝다"면서 "급속히 변화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위기에 처해 있는 출판의 현실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해서 착잡하다"고 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인쇄업은 그만두더라도 박물관 같은 문화적인 형태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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