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 2월1일 오후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비서 성폭행’ 관련 강제추행 등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방인권 기자) |
[이데일리 안대용 박순엽 기자] “`보통의 김지은들`이 만들어 낸 위대한 승리입니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가 9일 수행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54) 전 충남지사의 상고심에서 징역형을 최종 확정하자 방청석 등 대법원 안팎에서는 여성시민단체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안희정 징역형 확정에…여성단체 “`보통 김지은들`이 만들어낸 승리”
안 전 지사의 전(前) 수행비서 김지은씨를 지원해 온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전성협)는 선고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 안희정 전 지사의 유죄 확정 판결은 ‘보통의 김지은들’이 만들어낸 위대한 승리”라며 “`피해자다움`이라는 성폭력 판단 기준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오늘은 반(反)성폭력 운동사에 거대한 진전을 이룬 순간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밝혔다. 여성시민단체 회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환호하기도 했다.
지난해 3월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수행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안 전 지사는 이날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 6월형을 확정 받았다. 유력 차기 대권 후보 가운데 한 명이었던 안 전 지사는 수행 비서였던 김씨가 19대 대선 직후부터 수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미투(Me Too)` 촉발 이후 첫 1심 판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고 결국 최종 징역형 판결까지 받는 운명이 됐다.
지난해 8월 1심에서는 무죄를, 이듬해 2월 항소심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고 법정 구속되는 등 결과가 극명하게 엇갈렸지만 이날 대법원은 `권력형 성범죄`를 인정하면서 피해자 측 손을 들어줬다. 위력의 행사 여부 및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등 하급심에서 판단을 달리한 쟁점에 대해 대법원이 김씨 측 주장을 받아들인 셈이다.
◇성인지 감수성 강조…`피해자다움` 성폭력 기준 역사 뒤안길로
재판부는 과거 판례를 인용하며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했다. 피해자 진술 주요 부분이 일관되고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이 없는데다 허위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상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특히 앞선 하급심과 마찬가지로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했다. 성인지 감수성은 성별 간 불균형 상황을 인식해 그 안에서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내는 민감성을 뜻하는데, 미투(MeToo) 운동 이후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재판부는 “성폭행·성희롱 사건을 심리할 때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한 뒤,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한 증거 판단이라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위력으로써 간음했는지 여부는 행사한 유형력의 내용과 정도, 행위자의 지위나 권세, 행위자와 피해자의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면서 “위력에 의한 간음 및 추행 부분을 유죄로 판단한 원심에 잘못이 없다”고 설명했다.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측은 “`피해자다움`에 갇혔던 성폭력 판단 기준이 `피고인의 진술 신빙성`으로 바뀐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피해자 김씨의 법률지원을 맡은 정혜선 변호사는 “안 전 지사에게 적용된 범죄 성립 요건인 `위력`이 노골적인 갑질이나 폭력적 행태를 띄지 않고도 의식할 수도 없는 공기처럼 작동해 피해자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방해하고 왜곡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며 “그동안 제대로 말할 수 없었던 수많은 권력형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들에게 이번 판결이 주는 의미는 남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의 당사자인 김씨는 공대위에 입장문을 보내 “재판부의 공명하고 정의로운 판단에 진실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됐다”며 “올바른 판결을 내려준 재판부에 감사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한편 안 전 지사는 2017년 7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김씨에게 업무상 위력을 이용해 4차례 성폭행을 저지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또 5차례에 걸쳐 강제추행하고 한 차례 업무상 위력으로 추행한 혐의도 받았다. 앞서 1심은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2심은 10개 공소사실 중 9개를 유죄로 판단하고 징역 3년6월의 실형을 선고하면서 안 전 지사를 법정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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