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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 (금)

한일 경제전쟁 ‘克日’의 길| 克日의 또 다른 길은 ‘신남방정책’ 베트남 부품 협력사도 타격 있지만 아세안을 ‘경제우군’으로 키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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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 베트남에서 삼성전자의 1차 부품 공급사가 현지 공장을 철수시킨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삼성전자 벤더사들의 현지 철수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한일 경제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지자 현지는 어수선했다.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한일 경제전쟁의 포문을 연 불화수소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왔지만 이는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미묘한 상황에서 삼성전자 부품 공급사의 현지 공장 철수는 온갖 억측을 낳았다. 자칫 한일 경제 갈등이 현 정부의 핵심 정책인 신남방정책을 흔들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국책연구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소는 ‘일본의 대(對) 한국 수출규제와 신남방 지역영향’이란 보고서를 통해 “일본의 수출규제로 한국의 반도체 생산이 감소할 경우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등 신남방 지역 관련 산업에 부정적 영향이 우려된다”는 견해를 내놓아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보고서의 요지는 우리나라의 대일 수입 의존도가 높은 부품 소재분야 품목이 규제대상이 되면 국내 관련 산업은 타격을 받고 이로 인해 우리의 전자부품·장비 생산·수출이 감소할 경우, 한국과의 생산 네트워크 및 가치사슬(밸류체인)이 연계돼 있는 신남방 지역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2019년 상반기 기준 한국의 전체 반도체 수출에서 아세안의 비중은 12.8%로, 주요국별 반도체 수입 현황을 보면 베트남(64.2%)과 인도네시아(50.5%)에서 한국의 비중이 가장 높다. 필리핀에서는 대만·일본 다음으로 세 번째 순위다. 베트남의 우리 반도체 수입 현황이 높은 것은 하노이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삼성전자 휴대폰 공장과 무관하지 않은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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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베트남 공장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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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이어 “국제산업연관표를 이용해 한국 전자부품 및 장비가 신남방 지역 전자부품 및 장비 최종생산의 부가가치 기여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며 “이는 한국 전자부품 및 장비와 이들 국가의 생산네트워크 및 가치사슬 구축이 상대적으로 밀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연구소는 “부가가치 기준으로 한국 전자부품 및 장비가 베트남 등 신남방 주요 국가 전자부품 및 장비 최종생산에 기여하는 수준(0.06~2.72%)은 해당국의 전체 산업 부가가치 기여, 외국의 전체 산업 부가가치 기여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낮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소의 이 같은 분석은 우리가 그동안 아세안을 바라봤던 대체적인 시각이 저임금이 매력적인 단순 제조업 공장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많은 것을 고민케 한다. 일본이 우리의 경쟁력이 뒤처진 첨단 소재를 무기로 삼아 촉발된 한일 경제 갈등은 단순 제조업 위주의 산업 구조를 가지고 있는 아세안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아세안은 우리가 만드는 반도체에 필요로 하는 첨단 소재의 신 조달지로서의 역량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연구소의 이 같은 분석 결과는 우리의 아세안에 대한 접근법을 다른 측면에서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세안의 산업 구조가 변화의 전환점에 놓여 있을 수 있고, 이에 대한 준비가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아세안은 최근 몇 년간의 경제 성장 분위기에 힘입어 비교우위에 기반을 둔 세계 경제 구조 하에서 글로벌 하청 기지로 자리 잡은 역할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전자산업 뿐만 아니라, 전기자동차, 항공 부품 제조 등 첨단 산업 육성을 통해 자국의 산업 구조 변화를 꾀하고 있고, 블록체인 같은 신기술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다.

역내 선진국격인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은 이런 산업들을 국가 주요 정책으로 정하고 과감한 지원책을 아끼지 않는다. 일례로 태국은 파타야, 라용 등 기존 산업단지가 있는 동쪽 지역에 특별경제구역인 동부경제회랑을 건설 중인데, 바이오·로봇·전기차 등 첨단 산업을 유치하기 위해 과감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베트남도 마찬가지다. 하이테크 기업들이 자국 산업단지에 둥지를 틀면 역시 법인세 면제 등 다양한 세제혜택을 제공한다. 말레이시아는 차별화를 위해 첨단 기술의 집약체인 항공 부품 산업을 차세대 육성 산업으로 삼고 있다. 물론 이들의 기술 수준은 아직 미약하다. 또한 우리의 관련 산업의 생산 밸류체인에 넣을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기에는 발전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한 베트남 현지 기업인은 “싼 인건비만 보고 베트남에 들어오려 하는 것은 전혀 트렌드를 읽지 못하는 것”이라면서 “현지 고부가가치 생산이 많이 늘고 있고, 정부도 이 부분 육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반도체 산업의 여파가 베트남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유인 셈이다. 이미 일본은 아세안의 이 같은 변화를 빠르게 읽어내고 우리보다 한걸음 앞서 나가고 있다. 자동차 메이커 혼다가 자사 고급 세단 기종인 어코드의 하이브리드 기종의 생산기지를 태국으로 옮기겠다고 결정한 소식이 단적인 예다.

닛케이 아시안 리뷰에 따르면 혼다는 사야마 공장을 완전 폐쇄하고 태국에 혼다 하이브리드 기종의 생산기지를 완전히 옮길 예정이다. 이를 위해 회사는 2300억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사야마 공장은 2022년께 문을 닫는다. 닛케이 아시안 리뷰는 혼다의 이 같은 결정에 대해 “태국에서 하이브리드 차를 생산해 수출하는 것이 더 이익이 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재 태국 정부는 전기차, 하이브리드차 등 미래형 자동차에 대해서 법인세 및 소비세 감면, 수입 제조 장비에 대한 부담금 인하 등 파격적 세제 혜택을 통해 자국의 자동차 생산량을 늘리려 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일본보다 싼 노동력이 더해지면 글로벌 경쟁력이 생긴다는 판단을 혼다는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익이 나더라도 ‘품질’ 측면에서 태국의 생산능력이 혼다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면, 이 일본업체는 자사 첨단 고급 차종의 생산기지를 아세안 내로 옮기는 결정을 쉽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 품질을 포기하면서까지 이익을 챙기기는 것은 일본 자동차 메이커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닛케이 아시안 리뷰는 이에 대해 “혼다의 변화는 세계 자동차 제조업체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투자를 더욱 선택적으로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의미심장하다”며 “아세안의 (차량제조)기술이 하이브리드 같은 차를 만드는 데 있어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정도로 발달돼 가고 있다는 의미”라고 했다. 혼다는 태국에서 생산된 물량은 오스트레일리아 등 해외 각국에 수출할 예정이다. 혼다뿐만 아니라 미쓰비시가 2021년 출시할 하이브리드 차종의 생산을, 토요타는 전기차를 태국에서 생산할 계획이다. 일본계 자동차 회사뿐만 아니라 벤츠 BMW 등 독일계 자동차 회사들도 태국에서 내수용 하이브리드차를 생산하고 있다. 물론 반도체의 불화수소와 같은 전기차의 핵심부품은 거의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조달된다. 그렇더라도 부가가치가 높은 전기차 및 하이브리드 차량의 생산 공장이 아예 이전됐다는 것은 쉽게 넘길 대목이 아니다. 물론 우리도 아세안이 관심을 가지는 최신 산업 트렌드 분야의 협력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움직임은 더디다.

주형철 청와대 경제보좌관은 지난 7월 있었던 신남방 비즈니스 연합회와의 회의에서 디지털 경제분야에 있어서 신남방 국가의 성장잠재력을 언급하며, 데이터경제·인공지능·바이오헬스 등 4차 산업혁명 분야에서의 새로운 협력계기 발굴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일본, 중국 등은 일부 분야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며 시장 선점에 나서고 있다. 캄보디아에서는 중국 투자회사가 캄보디아 우체국이 투자한 벤처회사 등과 손을 잡고 대형 전자상거래 사이트를 8월 중순 오픈했다. 중국이 자본을 대고 사실상 캄보디아 정부가 공신력을 더해 준 것이다. 현재 이 사이트는 “캄보디아에서 가장 크고 유일하게 공인된 온라인 시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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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체 아세안에 대한 접근법에 대한 인식도 크게 바뀌지 않는 분위기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펴낸 ‘한국 중소기업의 동남아 주요국 투자실태에 대한 평가와 정책 시사점’을 보면 2016년 기준으로 한국의 이 지역 투자는 부가가치형 제조업인 전자부품·컴퓨터·통신장비 등의 분야보다 의복·신발·가죽·플라스틱 제조 등 관련 저임금에 기반을 둔 제조업에 여전히 더 많이 쏠리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신남방정책이 적극 추진되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만의 차별화된 전략을 펼치기보다는 아세안 현지 기업들의 개별 현안 해결 위주의 정책들이 먼저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아세안을 활용해 극일을 하자”는 구호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한걸음 내다보는 포석으로 아세안 시장에 다가가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만일 이 시점에 이를 해내지 못하면 일본, 중국 등을 따라가는 과거 정책 수준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한 민간전문가는 “현 정부가 신남방정책을 천명한 후 각종 회의가 늘어 많이 불려 다녔지만 실제 나아가는 모습은 찾기 힘들다”면서 “이해도가 없는 당국자나 관계자들에게 아세안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만 설명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꼬집었다. 이 전문가는 “대통령의 관심이 큰 정책이니 열심히 하려는 것 같은데 바로 각론으로 들어가도 모자란 시간에 매번 개론만 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이는 사실 우리의 아세안 정책에 대한 고질적인 문제다. 그동안 숱하게 관련 정책이 있어왔으나 연속성이 없으니 계속 출발선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경쟁국의 아세안에서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지고 있는 모습이다.

또 다른 전문가는 “신남방이라고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면 온통 베트남 진출 소식밖에 없다”면서 “우리의 아세안 접근 역량이 아직 이 정도 수준이라고 봤을 때, 그렇다면 일본이 태국을 공략해 성공한 것과 같은 결과물을 베트남에서 내야 하는데 우리가 그런 전략적 사고로 접근하는지 곱씹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전문가는 “한일 갈등 속에 아세안의 외교적 지원을 얻었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좀 더 거시적이면서 국익에 기반을 둔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면서 “아세안서 수입할 품목이 농산물밖에 없다는 수준에서 교역을 논할 것이 아니라 아세안에 대한 전략적 지원을 통한 성장, 그리고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안들을 내놓고 실천해야 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베트남을 예로 들면, 베트남이 원하는 산업 발전에 필요한 기술을 적극 이전해 주고, 이를 우리의 글로벌 생산 밸류체인에 넣는 방안을 현실적 수준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부분은 아세안이 우리에게 절실히 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세안은 우리의 2위 교역 상대이긴 하지만 매번 대규모 적자를 보고 있어 이에 대한 불만이 많은 것다.

박번순 고려대 교수는 “한일 갈등 와중에 아세안이 부각되는 것은 수출을 더 늘려 일본으로부터 입은 피해를 상쇄하자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라면서 “우리가 아세안에서 거두는 흑자 규모는 400억달러 수준으로 아세안으로부터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기에는…”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아세안을 우리의 우군으로 계속 자리 잡게 하려면 우리도 그만큼 그들이 원하는 것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일본의 우리에 대한 경제공격이 세계적으로 비판을 받는 이유는 자유무역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비교우위에 따른 글로벌 경제의 분업화를 잘 이용해 성장한 대표적인 국가다.

그런 일본이 이를 망각하고 수출 규제를 통해 사실상 기술과 자원을 무기화했다. 8월 초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외교장관회의에서 비비안 발라크리슈난 싱가포르 외교장관이 일본의 대한민국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를 두고 “신뢰관계를 증진하여 상호간 의존도를 높이는 것이 우리 지역의 공동 번영을 위해 필요하다”고 비판한 것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자유 무역의 기본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한-아세안 관계에 대입했을 때 우리도 자유로울지는 되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일본을 향해 화이트리스트 문제를 제기했던 싱가포르도 우리도 화이트리스트 목록에는 없다.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만의 새로운 분야를 가지고 아세안에 다가갈 필요가 있다”면서 “일본이 과거에 공략했던 방식을 우리가 지금 사용한다고 하면 무슨 효과가 있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이 선임연구원은 “각국별 맞춤 전략도 고려해볼 만하다”면서 “역내 선진국인 싱가포르와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를 하는 것은 좋은 예”라고 했다.

서정인 한아세안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은 “우리도 아세안을 우리가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상품의 글로벌 공급망으로 어떻게 활용하지 고민을 하는 것이 맞다”면서 “아세안 역내에도 고급인력들이 꽤 있어 차제에 우리 기업들이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앞서 언급한 베트남 삼성전자 부품 공급업체의 국내 철수와 관련해 이에 대해 현지 사정을 아는 관계자는 “회사 자체 문제이며 일본발 경제 충격과는 별 상관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전했다. 하지만 이 같은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이번 한일 갈등의 파장이 만만치 않다.

[문수인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8호 (2019년 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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