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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탈코르셋, 선을 넘어야 알 수 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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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트페’ 이민경 작가 네번째 책

“주체적 꾸밈은 저항력 이미 상실

탈코르셋은 혁명…여성공동체의 시작”



한겨레

탈코르셋-도래한 상상
이민경 지음/한겨레출판·1만6000원

<82년생 김지영>이 질문자라면 ‘92년생 이민경’은 답변자다.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케이(K)-페미니즘’에 대한 일본 출판계의 평가다. 이민경 작가의 첫 책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은 지난해 12월 일본어판으로 출간되어 “김지영이 질문이라면 ‘입트페’는 해답”이라는 반응을 얻었다.

이 작가는 2016년 5월17일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한국에서 가장 많은 페미니즘 번역·저작 활동을 한 사람일 것이다. 3년여 동안 네 권의 책을 썼고 네 권의 번역서를 냈다. ‘그 사건’ 직후 친구들과 함께 출판사 봄알람을 차려 그해 8월 초 발간한 첫 책 ‘입트페’는 지금까지 6만5000부를 찍었다. 그 사이 국제회의통역전공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며 페미니즘 언어를 짓고 옮긴다. 새 책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을 손에 쥔 그를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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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코르셋 운동이 규모에 견줘 평가절하되어 안타까웠어요. 이번 책은 작가로서 쓰기에 대한 고민을 가장 많이 한 것 같아요. 3년 넘게 노동, 낙태 문제에 개입해온 액티비스트로서 자부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잘 듣고 철저히 통역하여 정교한 담론으로 쓰고 싶었어요. 책의 구조를 만드는 데만 1년이 걸렸습니다.”

이 책은 2017년 시작돼 2018년 확산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탈코르셋’(탈코) 운동을 다룬다. 탈코는 사회구조적인 외모 강박이나 여성성 강요에 저항하려는 목적으로 화장, 성형, 긴 머리, 여성적 옷차림 등 ‘사회적 여성성’을 전면 부정하는 운동을 가리키는데, 머리를 짧게 하고 화장을 하지 않으며 셔츠와 바지 차림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는 ‘#탈코르셋_인증’ 해시태그의 주인공 상당수가 아이돌 ‘소녀시대’ 데뷔 무렵 태어난 10대들이라는 점, 여자 아이돌 이미지에 둘러싸여 지금껏 살아왔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인터뷰한 ‘탈코인들’ 절반 가량이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교사들이었다. 수영장에 가서도 옷을 착착 개놓는 여자아이들을 보고 ‘대한민국이 네댓살 여자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며 일을 그만둔 이도 있었다. 국내 영유아 화장품 시장 규모는 2017년 2000억원 규모에 이르렀다.

“자유, 선택이란 미명 아래 욕망의 내면화가 너무 빠르고 강력하게 일어난 지금, ‘주체적 꾸밈’의 저항력은 상실되었어요. ‘화장이 저항’이라는 주장은 여아들의 삶의 맥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돼요.” 본인도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했다. 1년여 동안 서울, 경기, 대전, 전주, 대구에서 100여명의 여성을 만났고 그 중 17명의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놀랍게도 이 운동엔 ‘중간’이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확 깨지는 것처럼 바뀐다”고 그는 말했다. 몸이 선을 넘으면 다른 세계,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탈코르셋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독법이자 기나긴 인정투쟁으로부터의 해방이에요. ‘나는 나답게 아름답다’는 몸 긍정주의(body positivity)는 꾸밈의 레이스를 유지하지만, 탈코르셋은 ‘아름다울 필요가 없다’ ‘그래 나 못생겼어’ 하면서 인정투쟁을 그만두게 되는 거죠.”

한겨레

뭇 시선에서 해방되면 폭발적 변화가 일어난다. “응시 당하다가 맞응시(countergaze)하는 순간” 여성들은 자신을 “볼드모트” 같은 괴물로 깎아내리고 대상화하던 비하, 중독에서 벗어났다. ‘이성애 각본’에서 탈출해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던 관계를 정리하고, 자기 몸을 외형이 아니라 기능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작고 인형 옷 같은 여성복(“사탕 껍질”)을 내려놓고 사람이 입을 만한 옷들을 찾았다.

“치마를 입고 출근했다가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불편한 용기’ 시위에 가려고 바지를 사서 입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는 굉장한 대전환이죠. 인정을 구하는 참조집단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꾸게 되니까요.”

소비력에 올인한 여성의 미래는 외모로 얻은 권력이 아니라 “거지 할머니”라는 직관적 통찰이 온라인에서 힘을 얻었다. ‘탈코인’들은 여성을 ‘멋진 소비주체’로 추켜세우던 산업 담론에서 벗어나 통장을 만들며 자립과 생존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저는 이 운동이 여성 몸이 만들어낸 지식이며 투쟁의 명맥을 분명히 잇는다는 확신이 있어요. 2018년에 일어난 엄연한 혁명으로서 탈코르셋 운동의 서사가 기억되고 그 뒤의 여성들과 연결되길 바라면서 썼어요. 탈코르셋은 도래할 여성공동체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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