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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렌즈타고 한국여행] 북적임 속에서 만난 뜻밖의 고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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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 LMspencer / Shutterstock


제주의 여운이 여간 긴 게 아니었다. 부산에서, 서울에서도 나는 여전히 제주 앞바다의 고요함을 떨치지 못했다. 잔잔함에 취해 있기에 도심이 내뿜는 소음은 너무나 가혹했다. 하루는 아내의 권유로 경복궁을 향했다. '도심에 자리 잡은 궁전이라니!' 잠시나마 시끄러움을 떨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광화문에 도착해 입구를 맞이했을 때 기대는 걱정으로 바뀌었다. 수많은 인파가 광장을 채우고 있었다. 금세 맑던 하늘이 알 수 없는 말소리와 발자국 소리로 뿌예졌다.

딱히 내키지 않던 터라 아내의 손을 잡고 담벼락을 따라 걷기로 했다. 한복을 입고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인 인파와 약간의 시내 길을 지나자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옥마을을 지나니 경복궁과 조금 다른 담벼락이 길을 따라 들어섰다. '이것도 궁전인가?' 궁금증을 자아냈다. 입구에서 봤을 때 경복궁에 비해 사람이 적어 보였다. 간판에 적힌 읽기 힘든 알파벳이 이곳의 이름을 서툴게나마 말해주고 있었다.

작은 나무 문을 몇 개 지나자 말소리가 걷히고 새소리와 함께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오랜만에 적막을 즐겼다. 나도, 아내도 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눈에 들어오던 건물 앞에 섰다. 두 겹의 처마를 두른 거대한 목재 건물이 자신이 이 공간의 주인공임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정성스레 쌓아둔 기와와 색색이 물든 처맛기슭을 뒤로 파란 하늘, 흰 구름이 자리를 잡았다. 렌즈를 통해 뭉게구름이 반쯤 걷히는 것을 천천히 지켜보았다.

매일경제

여유를 만끽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궁터 깊숙이 들어가니 우거진 소나무가 주변 소음을 삼켜 고요함이 더해진다. 이름 모를 연못을 다섯 개의 작은 건물들이 에워싸고 있다. 사진을 찍는 이들과 뒷짐을 지고 연못을 바라보는 이들, 돌계단에 걸터앉아 사색에 잠긴 이들까지. 다양한 사람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끄럽지 않았다. 약간의 말소리와 연못 터를 부유하는 새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가 어우러져 제주 앞바다의 고요함을 재현한다.

고요 속 약간의 사색을 즐겼다. 제주에서 뜻밖의 자연을 보았고 서울 도심에서 뜻밖의 고요함을 찾았다. 이렇듯 삶은 이따금씩 기대하지 못한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아내 레이첼을 만난 것도, 여행이 삶이 된 것도, 취미로 시작한 사진이 셔터스톡을 통해 긴 여행의 원동력이 된 것도 모두 뜻밖의 즐거움일 테다. 창덕궁을 뒤로 아내와 다시 길을 나섰다. 아직 가봐야 할 곳이 많다. 또 어떤 뜻밖의 즐거움이 기다릴까. 참으로 모를 일이다.

※ 취재협조 = 셔터스톡

[레오나르도 스펜서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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