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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기자칼럼]피해자의 품격, 국가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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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운씨(74) 가족을 처음 만난 건 2009년이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 “피고인들은 모두 무죄.” 재판장이 판결을 선고하자, 피고인석과 방청석에선 분노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환호라고 할 수도 없는 묘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탄식하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박수를 쳤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앉지도 서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는 이도 보였다. 사연 없는 소송이 없고, 승소와 패소로만 단정할 수 없는 것이 판결이지만 그날의 풍경은 더욱 그랬다.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 피해자들의 재심이었다.

경향신문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은 법조를 출입한 뒤 처음으로 취재한 재심사건이었다. 그때 나는 4년차 기자였다. 군사정권 시절 위정자들은 민간인들을 간첩으로 조작해 ‘나라의 군기(국민들을 다 부하처럼 여겼던 것 같다)’를 잡았다. 무작정 잡아다 감금하고 고문한 뒤 허위자백을 강요했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간첩단 검거’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경향신문도 그때 그런 보도를 했다. 1981년 7월31일자 경향신문 1면을 보면, 왼쪽 머리기사로 ‘부부, 아들 낀 고정간첩 7명 검거’라는 제목의 기사를 볼 수 있다. “진도를 거점으로 24년간 암약했다”는 내용과 함께, 피의자 5명의 얼굴사진도 실렸다. 그때 두 살이던 나는 물론 이 기사를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한 피해자의 말 때문에 옛날 기사를 찾아봤다. 그날 재심재판이 끝나고 기자들은 법정 밖에서 피해자들을 기다렸다. 28년 만에 ‘간첩’이라는 멍에를 벗은 소감을 듣기 위해서였다. 한 피해자가 말했다. “당신들이 우리가 간첩이라고 신문 1면에 썼잖아요. 이제 우리가 간첩이 아니라고, 다시 그만 한 크기로 써줘요.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사람은 박동운씨의 고모부, 허현씨였다. 하필이면 허씨의 정면에 서 있던 나는 그 말이 가시 같았다. 슬픈 예감은 맞았다. 28년 전의 기사를 보며, 얼굴이 벌게졌다.

2019년 7월10일 전남 진도에서 박동운씨와 허현씨, 박미심씨를 만났다. 좋은 일로 만났다면 좋았겠지만, 여전히 국가의 손해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취재하기 위해서 만났다. 박근혜 정부에선, 양승태 대법원이 조작사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를 개발해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거래’를 시도했다. 문재인 정부에선, 재심을 거쳐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지만 법무부가 상고해 이를 또 막고 있다.

이 사건의 피해자 8명 중 3명은 고인이 됐고, 생존자들은 모두 나이 앞자리가 바뀌었다. 박씨 가족을 다시 취재하면서, 국가로부터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고 사회로부터 매정한 손가락질을 당한 이들이 지난 10년간 묵묵히 다른 피해자들(고문피해자, 쌍용차 해고노동자, 용산참사 피해가족, 세월호참사 가족)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고 한동안 멍했다. 잔인한 국가는 여전히 이들을 괴롭히고 있지만, 이들을 망치는 데는 실패했다. 박동운씨 가족은 스스로 ‘피해자’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피해자들의 품격이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10년 전 이 가족의 사건을 처음 취재했던 나는 14년차 기자가 됐다. 지금의 경향신문은 국정원이나 검찰에서 발표한 사건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쓰지 않는다(고 믿는다). 전두환 정권 때 시작된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은 정권이 7번 바뀐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국가만, 지독하게도 변하지 않았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지난 9일 “서해맹산(誓海盟山)의 정신으로 공정한 법질서 확립, 검찰 개혁, 법무부 혁신 등 소명을 완수하겠다”고 밝혔다. 38년 전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굳이 산과 바다에까지 맹세할 필요는 없다. 행정문서(상고 포기) 한 장이면 된다. 부끄러움을 아는 국가의 품격을 기대한다.

장은교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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