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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여적]남산 위안부기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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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은 북악과 함께 서울을 대표한다. 진산(鎭山)인 북악이 임금의 땅이라면 안산(案山)인 남산은 백성들의 거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개국 후 남산 정상에 목멱신사를 세웠다. 오늘날 국사당의 전신이다. 당초엔 이름 그대로 국가 제사를 담당했으나 뒤에 서민의 기도처, 무속인의 굿당으로 변했다.

남산과 일본의 악연은 역사가 깊다. 조선 전기 남산 기슭에는 일본 사신의 숙소 동평관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의 진지로 사용됐다. 갑신정변과 청일전쟁을 거치며 남산 자락은 일본인의 집단거주지가 되었다. 지금의 숭의여대 일대다. 일본은 을사늑약을 전후해 남산 침탈을 본격화했다. 방식은 신사와 공원 만들기였다. 1898년 경성신사로 시작된 신사 건립은 1925년 조선신궁으로 정점에 달했다. 조선신궁은 일왕가의 시조신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일왕을 제사신으로 삼은 한반도 내 조선신사의 총본부였다. 20만평의 대규모 신궁이 들어오면서 국사당은 서대문 밖 인왕산 중턱으로 쫓겨났다. 신궁 설치에 맞춰 경성역과 경성부립대운동장(구 동대문운동장)도 개장했다. 일본의 신사 통치를 근대문명으로 포장하려는 노림수였다. 조선신궁은 식민통치의 이념을 제공한 핵심 장소였다.

광복이 되면서 조선신궁은 해체됐다. 흔적 지우기의 일환으로 동상 건립이 논의됐다. 백범 김구가 1순위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승만 동상이 맨 먼저 건립됐다. 25m 초대형이었지만 4·19혁명과 함께 철거됐다. 1959년 5월에는 안중근 동상이 건립됐다. 당시 안 의사의 동상이 세워진 곳은 숭의여고 앞이었으나 196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백범 동상은 우여곡절 끝에 1969년 세워졌다.

14일 위안부기림의날을 맞아 조선신궁터에 위안부기림비가 제막된다. 남산 서울시교육청교육연구원 앞에 세워지는 기림비는 한국·중국·필리핀 소녀 3명이 손을 맞잡고, 이를 고 김학순 할머니가 바라보는 모습을 실물 크기로 표현했다. 샌프란시스코 위안부기림비를 만든 조각가 스티븐 와이트의 작품이다. 인근에 안중근과 김구의 동상이 있다. 모레는 74주년 광복절, 치욕의 역사현장에 당당히 선 김구·안중근·김학순의 외침을 새겨야 할 때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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