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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송두율 칼럼]서가를 정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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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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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생활 반세기를 넘기면서 그동안 모았던 많은 책들을 얼마 전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책은 구입한 동기가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지만 어떤 책은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전공인 철학이나 사회과학 서적은 물론, 문학작품이나 예술 관련 서적들도 모두 저자가 살았던, 아니면 살고 있는 시대의 고민과 희망을 담고 있다. 어떤 책들은 이미 고전이 되어 시대를 뛰어넘어 읽히지만 어떤 책들은 당시에는 많이 읽혔으나 지금은 아예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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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독일 생활의 시작은 전후에 견고해진 냉전체제를 부수는 작업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던 시기와 일치했다. 이 시대를 풍미했던 사상의 기초는 물론 마르크스가 제공했다. 서가의 한쪽에 꽂혀 있는 <자본론>을 먼지 털며 펼쳐 보니 나도 곳곳에 주를 달면서 꽤 열심히 읽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마르크스의 계승자로 추앙받았던 레닌의 <국가와 혁명>도 당시에는 필독서였다. 다른 책장에는 중국어와 독일어판의 <모택동선집>이 꽂혀 있다. ‘문화대혁명’ 때 사회주의혁명과 건설노선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벌어졌던 중국과 소련 사이의 논쟁에 큰 몫을 했지만 이제는 먼지만 수북이 쌓여 있다.

내가 몸을 담았던 ‘프랑크푸르트학파’도 이런 소용돌이 속에 곧 휩쓸렸는데 이의 수장 격이었던 아도르노와 하버마스는 과격해진 학생운동을 ‘좌익 파시즘’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들과 결별했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필독서처럼 읽혔던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은 두 권이 서가에 나란히 꽂혀 있는데 한 권은 내가 구입했고 다른 한 권은 저자가 우리 부부의 결혼을 축하하며 보낸 선물이었다.

사회 변혁을 추구했던 이론과 실천이 난관에 봉착하자 출구를 테러에서 찾는 급격한 움직임도 있었지만 새로운 대안을 찾아 닻을 올린 ‘녹색’운동도 이때 시작했다. 이는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의 등장이 상징적으로 보여준 신자유주의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기도 했다. 특기할 점은 이 대안이 마르크스나 레닌 같은 어떤 출중한 이론가나 실천가에 의해 제시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물론 프랑스의 앙드레 골츠와 같은 이론가도 있었지만 보다 나은 인간적인 삶을 모색했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제 ‘큰 이야기’ 대신 ‘작은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세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은 특히 프랑스의 지성계를 중심으로 유행처럼 확산되었다. 이른바 ‘탈현대’의 탄생이었다. 현대가 전제했던 이성에 의해 배제 또는 추방되었던 세계를 다양성의 폭력없는 통일이라는 기치 밑에서 복권하려는 시도는 미국의 학계나 예술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니체와 하이데거를 낳은 독일의 분위기는 정작 그렇지는 않았다. 라인강을 경계로 서로 이웃한 독일과 프랑스는 이 점에서도 역시 차이를 보여주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탈현대에 관한 논쟁은 곧장 ‘역사는 끝났다’라는 ‘탈역사’로 옮겨갔다. 한편에서는 역사라는 명제로써 더 이상 진보에 대한 꿈을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을 체념과 냉소로 맞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역사는 자유민주주의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기에 이제 더 이상 역사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고 단언했다. 이와 더불어 정치나 경제와 같은 일상적이거나 진부한 문제로부터 벗어나 심미적인 이성에 심취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이런 정신적 상황 속에서 나는 역사가 정말 끝났는가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탈역사에서 오는 체념이나 또는 낙관으로 역사를 아예 폐기처분하려는 태도가 실은 역사를 오로지 서구의 궤적에 따라 설명하려 했기 때문에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이주민 문제를 앞세운 인종주의마저 기승을 부리는 서구 사회의 현실은 우리 모두가 그렇게 쉽게 역사를 장송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역사와 세계는 앞으로도 열려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당시는 물론, 지금도 지니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화두는 아무래도 ‘지구화’다.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했던 민족국가 단위의 삶이 흔들리면서 거의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정보흐름은 우리 모두가 이미 하나의 세계사회 안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그러나 최근 악화일로를 달리는 한·일관계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의 경제권에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는 두 나라가 일제의 만행과 독도 문제로 압축 표현될 수 있는 기존의 시간과 공간 개념에 의해 여전히 제약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간이 사라지고 시간도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는, 맥루한이 묘사한 지구촌의 의미를 우리는 비판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참된 지구화란 개별적인 지역의 의미가 사라지면서 하나가 된 지구촌 안으로 이것들이 강제로 흡수되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얼마 전 작고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도 ‘지구적’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는 본래 수많은 개체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만들어내는 전체라고 강조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내가 경험한 유럽의 지적 흐름을 담은 서가를 정리하는데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코헬렛>의 구절을 인용한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한 페이지가 눈에 띄었다. 세계가 닫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자칫 허무감도 불러올 수도 있는 <구약성서>의 이 구절은 오히려 옛것을 통해 새것을 배운다는 <논어>에 등장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뜻에 가깝다. 세계는 과거와 현재에도 그렇듯이 앞으로도 열려 있으며, 세계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노력도 끊임없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90세를 맞은 하버마스 교수가 올 11월에 1700쪽에 달하는 믿음과 앎의 관계를 서술한 책을 낸다. 종교가 세속화되는 과정 속에서 언젠가는 사라질 것으로 보았던 계몽철학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은 그였다. 이성의 아주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종교문제에 대해 그가 마지막 열정을 쏟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오늘과 미래를 위한 과거의 의미를 나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무거운 책들을 정리하면서 앞으로는 전자책이 인쇄된 책을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오래된 책이 발산하는 기분좋은 냄새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락사락 들리는 소리를 책의 속성처럼 여겨온 내게는 이런 일이 아직은 먼 훗날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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