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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전우용의 우리시대]식민잔재 ‘청산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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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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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 감격과 흥분이 가라앉을 무렵, 한국인 대다수는 “우리는 어떤 민족인가?”라는 질문에 새 대답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그들이 알던 ‘조선민족’은 스스로 근대 국가를 유지할 능력도, 근대 문명을 향유할 능력도 갖지 못한 저열한 민족이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일본민족의 지도하에 특유의 나약하고 비루하며 나태하고 불결한 민족성을 척결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과제라고 배웠다. 그때까지 그들은 문명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조선민족’이라는 자의식을 소멸시키고 일본민족의 일원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담론에 포위되어 있었다. 이런 자의식을 떨쳐내지 못한 상태에서는 열강의 신탁통치를 배격하고 즉각 독립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설령 즉각 독립을 이룬다손 쳐도, ‘조선민족’에게 그 독립을 유지할 능력이 있는가?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자격을 남에게 요구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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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이 먼저 ‘민족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려고 했다. 신탁통치 문제가 최대의 관심사였던 1946년, 김성칠은 “그릇된 일본 교육으로 말미암아 부지중에 아이들의 뇌수에 밴 자기모멸의 사상을 씻어 버리고 우리 민족에 대한 자신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새로운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조선역사>)고 주장했다.

이듬해 김광훈은 일본이 조선민족을 식민지 민족으로 묶어두기 위해 개조한 역사를 이렇게 정리했다. “일본 어용학자들이 조선 역사를 개조한 것은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 조일(朝日) 동화정책을 합리화하고 그들의 착취를 완수하며 조선민족을 노예화하려는 것이니 왈, 조선 역사의 장구성은 부당하다. 왈, 고구려는 조선 역사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왈, 삼국은 일본에 노예 당하였다. 왈, 조선민족은 타율적으로 움직였다. 왈, 조선민족은 열등족이라. 왈, 일선(日鮮)은 동조(同祖)이라 등등 무수 잡다한 골계(滑稽)와 소위 걸작(傑作)을 연출시켰으니 이것으로써 그들은 조선민족이 당연히 일본과 동화일체가 되어야 하고 또 마땅히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민족이라는 지위를 감수하여야 옳을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어 소위 내선일체 일본 식민지화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려 하였던 것이다. (…) 그러나 문제는 일제 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오늘날에 있는 것이다. 이 불유쾌한 사생아가 후안무치하게도 횡행하는 것이다. 이들이 횡행하는 역사적 지반은 구태여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거니와 일제 역사를 그대로 재판(再版)하는 것을 능사로 알고 있다.”(<일인이 개조한 조선역사> <신천지>)

그가 ‘구태여’ 말하지 않은 ‘역사적 지반’이란 정치적 식민 지배는 끝났으되 정신적, 사상적 식민 지배는 끝나지 않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어떤 문제든 인식한다고 해서 바로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일본인 학자들이 수십년간 근대적 방법으로 구축해 놓은 역사상(歷史像)을 짧은 시간 내에 재구성할 수는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민족적 자의식은 이미 관행, 관습, 문화, 제도로 굳게 뿌리내린 상태였다. 게다가 엘리트 집단의 대다수는 식민지 시대의 자의식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광복 이후 많은 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했지만, 대학교재로 쓸 만한 책도 없었다. 일본인 학자들이 버리고 간 헌책을 구해 보거나, 일본에서 오는 책 밀수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광복 10년이 넘도록 ‘불유쾌한 사생아’는 계속 성장했다.

물리적 환경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서울 주요 가로변에는 와타나베 모자점, 후지모리 운동구점, 나카무라 시계점 같은 간판들이 버젓이 걸려 있었다. 간판을 바꿀 돈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총독부 청사가 정부 중앙청사로, 조선총독 관저가 대통령 관저로 쓰이는 현실에서 상인들도 굳이 무리해서 간판을 교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조선어 말살정책의 영향도 무척 오래갔다. 광복 직후에는 한글을 새로 배워야 하는 ‘지식인’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한글보다 일본어 가나가 훨씬 더 익숙했다. 많은 지식인이 가족이나 친지에게 보내는 사신(私信)을 일본어로 작성했다. 언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수많은 사물과 개념들이 여전히 일본어 이름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자는 주장조차 불온시되었다. 집권세력이 이런 주장을 ‘친일파 청산’과 같은 정치적 맥락 위에 있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식민잔재 청산 주장이 다시 분출한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 ‘주권자 공동체’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진 4·19 이후였다. 광복 이후 15년간 미뤄두었던 민족 정체성 재정립의 과제를 속히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분야에서 제기되었다. 1965년 한·일 국교 재개를 앞두고는 정부도 이를 중요한 국가적 문제로 인식했다. 박정희 취임식에 파견된 일본 특사가 “아들의 경사에 참석하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한 사실이 이미 널리 알려진 판국에 민족의 자존심을 헐값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비난까지 받는 형편이었으니,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만들어 보여주어야 했다.

관(官)과 민(民)의 의도와 방향은 달랐으나, 이 무렵부터 식민사관 극복이니 민족정기 확립이니 하는 말들이 인구에 회자되었고 일본어 퇴치운동도 본격화했다. 하지만 일상 언어생활에서 벤토, 와리바시, 즈봉, 도쿠리 같은 단어들이 사라진 것도, 학생들이 학교에서 ‘식민지 민족의 자기모멸’을 배우지 않게 된 것도 1970년대 중반 이후였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물리적 환경도 그 무렵에서야 확연히 바뀌었다.

그로부터 40여년, 최근 일본의 경제도발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은 식민잔재 청산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드러내고 있다. 지금의 한국인은, 독립국가 국민과 식민지 주민으로 나뉘어 있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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