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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검찰로 간 예능…‘프로듀스 사태’가 말하는 ‘공정성’에 대한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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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 투표로 아이돌 뽑는 경연 프로

엠넷 “조작 없다” 주장하지만

순위 표차 반복 등 의혹 제기 돼

시청자들, 제작진 등 사기 혐의 고소

‘나의 한표로 결정’ 환호했지만

공정경쟁 흔든 ‘보이지 않는 손’

채용비리 등 사회 불평등과 맞닿아

‘노력에도 물거품’ 배신감 폭발

경연 프로그램 폐지 의견도

“무한경쟁 생존 강요…엄청난 폭력

시청자·출연자 모두가 피해자”

전문가들 비판 목소리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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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아이돌 그룹 엑스원의 멤버를 뽑는 경연프로그램인 <프로듀스 엑스(X) 101>(엠넷)의 순위 조작 논란 사태가 일파만파다. 지난달 19일 최종 멤버 11인을 결정하는 마지막회 생방송에서 제작진이 문자투표수를 조작해 탈락자와 합격자를 뒤바꿨다는 의혹인데 논란은 인터넷 세상을 넘어 수사기관으로까지 번졌다.

시청자들은 유료 문자투표 결과 많은 표를 받았을 것으로 예상된 유력 연습생들이 탈락하고 뜻밖의 인물이 순위에 들어오면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들은 특히 1~20위 중 일부 득표 숫자가 7494.442의 배수로 이뤄진 것을 조작의 근거로 들고 있다. <엠넷> 쪽은 “조작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시청자 260명은 ‘프로듀스 엑스 101 진상규명회’를 구성하고 제작진과 일부 소속사를 사기 혐의로 고소,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했고, 경찰은 지난달 31일 씨제이이엔엠 내 프로듀스 엑스 제작진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2016년 <프로듀스 101>을 시작으로 2017년 <프로듀스 101 시즌2>, 2018년 <프로듀스 48>까지 늘 마지막회 생방송에선 ‘이변’이 있었다. “쟤가 왜?”라며 의혹을 제기하는 말들이 나왔지만 지금처럼 고소·고발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사건의 정확한 경위를 따지는 것과 별개로 경연프로그램 순위 논란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됐다는 점에서 사안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시청자를 ‘납득’시키기 어려운 결과

그렇다면 이번 <프로듀스 엑스 101>은 이전과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일단은 시청자들의 예상과 실제 결과의 간극이 이전보다 훨씬 컸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케이블 예능프로그램 피디는 “결과를 납득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며 “예전 ‘프로듀스 시리즈’는 ‘탈락한 연습생도 아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합격한 연습생들도 뽑힐 만하다’라며 최종 멤버에 대해 어느 정도 납득 가는 부분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시청자들이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 실력 있는 후보도 떨어질 수 있다는 경연프로그램의 숙명과 팬들의 속상함 정도로 넘기기엔 정도가 심했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이전에는 그냥 넘어갔던 부분을 이번에는 문자 득표수를 하나하나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결국 석연찮은 부분이 등장하면서 ‘설마’했던 부분이 ‘진짜?’로 바뀌기 시작했고, 조사 범위가 이전 시즌까지 번지고 있다. ‘프로듀스 엑스 101 진상규명회’는 “<엠넷> 쪽의 어떠한 가공도 되지 않은 데이터 공개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명확한 해명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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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경연프로그램은 공정하다고 믿었는데…

전문가들은 특정 멤버의 팬덤이 아니라 프로그램 시청자들이 집단적으로 한목소리를 낸다는 점을 주시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프로듀스 엑스 101> 사태를 단순히 팬덤의 팬심 문제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며 “공정 사회를 향한 젊은 세대의 갈망이 투영된 변화”라고 말했다.

모든 경연프로그램은 투표라는 시스템으로 뽑는다는 점에서 ‘공정한 경쟁’이라는 판타지를 심어주는데, ‘프로듀스 시리즈’는 그런 면에서 팬들을 충족시키는 강도가 더 강했다. 또 다른 예능 피디는 “제작진이 정해놓은 전문가 심사위원들의 점수와 시청자 문자투표를 더하는 보통의 경연프로그램과 달리 ‘프로듀스 시리즈’는 ‘국민 프로듀서’를 내세우며 100% 시청자 투표를 강조했다. 기성 세대에 의한 평가를 거부하는 요즘 젊은 세대는 우리 손으로 직접 연습생들을 평가할 수 있다는 대목에 특히 더 환호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프로듀스 엑스 101>을 가장 많이 본 연령대는 10대로, 전체 시청률의 절반을 차지한다. 자신들의 선택이 공정한 경쟁의 장을 통해 그대로 결과에 반영된다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이 모든 것이 조작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이다. 정덕현 평론가는 “기득권의 개입이나 봐주기가 아니라 공정한 투표시스템으로 선발하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 부분이 깨지니까 후폭풍이 거센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나의 한 표’가 열심히 노력하고 성장하는 연습생들을 ‘픽’해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어왔는데 그런 연습생들의 노력마저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는 데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끊임없이 불거지는 각종 채용비리 사태에서 보듯 누구 자식으로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났느냐가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사회의 불평등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하는 시각도 많다. 청소년 10명 중 8명이 “한국 사회는 불평등하다”고 답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이 사태에 담겨 있는 것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열심히 일하며 노력해서 스펙도 쌓았지만 결국 ‘뒷구멍’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 의해 밀려나는 현실에 절망한 젊은 세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전제한 뒤 “최소한 경연 프로그램에서만큼은 열심히 하는 이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내가 지지하고 도울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최소한의 보루마저도 무너졌다고 느끼니 좌절감이 큰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단순히 ‘예능프로그램 하나 갖고 뭘 그리 난리냐’고 얘기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사회문화적으로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기성 시스템에 갇혀 고혈 짜내는 아이들…이대로 놔둬도 되나

투표의 조작 여부와 관계없이 경연프로그램 자체의 시스템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프로듀스 엑스 101> 조작 논란을 계기로 경연 프로그램의 존치 여부를 돌아봐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황진미 대중문화 평론가는 “경연프로그램은 구조의 문제보다도 모든 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만든다. 무한경쟁 시스템 속에서 생존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폭력”이라며 “경쟁을 통해 죽고 사는 식의 이런 프로그램을 계속 만들어도 되는지 고민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막막한 미래에 한줄기 빛 같은 경연프로그램에 출연해 시청자들을 향해 “국민 프로듀서님”이라고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하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연습생은 물론이고, 투표하는 시청자들 역시 또다른 경쟁에 내던져진다.

특정 연습생을 응원하는 시청자들은 내가 원하는 후보가 최종 멤버에 올라가게 하려고 사비를 털어 지하철·버스 광고를 하고, 심지어 투표를 하면 경품을 주는 이벤트도 연다. 일종의 ‘불법 선거’인 셈이다. 그들이 그렇게 혐오하는 기성 세대의 행동을 따라하며 결국엔 상업주의의 틀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된다. 한 건에 100원씩 하는 유료 문자투표 수익, 최종 결정된 멤버들이 벌어들이는 돈의 대부분은 씨제이이엔엠과 소속사가 가져간다. 연습생들의 비율은 많지 않다. 정덕현 평론가는 “마치 게임을 하는 심리처럼 내가 정한 캐릭터를 어떻게든 키워나가려고 하는 마음과 같다”며 “시청자도 출연자도 모두가 피해자다. 아이들의 고혈을 짜내서, 아이들이 코 묻은 돈을 쓰게 하는 이런 경연프로그램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 다른 방식으로 구현해 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2일 이 사건을 형사6부에 배당했다. 이제 시청자들의 관심은 ‘공정한 수사’로 쏠린다. ‘프로듀스 시리즈’를 시즌1부터 줄곧 보며 늘 투표에 참여했던 20살의 한 시청자는 “조작이 없다고 결론이 나더라고 그 수사 결과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 다음 시즌을 또 한다고 해도 다시 득표 수를 따져보게 될 것 같고, 예전처럼 좋은 마음으로 연습생들을 바라볼 수 있을지 자신없다”고 말했다. 윤석진 교수는 “‘프로듀스 시리즈’를 보며 자라는 젊은이들은 진실 규명이라는 게 한국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내면화시킨 세대”라며 “그래서 이 사건의 수사 결과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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