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06 (일)

백골조차 사라진…일 대본영 땅굴 속 조선인 원혼들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마쓰시로 대본영’ 조선인 강제동원 현장을 가다

‘본토 결전’ 위한 무모한 공사에

조선인 6천여명 동원돼

사망자 수백명으로 추정

이름 확인된 희생자 4명뿐

화장터에서 봤다 증언 있지만

어디에 묻혀있는지 알 길 없어

조선 여성 동원된 위안소도 존재

“강제동원 없다. 임금도 줬다

이야기하는 젊은이들 늘어”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조선인 노동자들이 하루 2교대로 12시간씩 일했다. 불과 9개월 만에 총 13㎞ 길이 땅굴을 팠는데 보통 터널 공사에선 몇 년이 걸려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9일 일본 나가노현 나가노시 마쓰시로 대본영 지하호(요새) 중 일부인 조산 지하호 앞에서 이 지역 역사 연구가인 하라 아키미가 탐방객들에게 이 공사가 얼마나 가혹한 공사였는지부터 설명했다. 지역 역사 연구가인 그는 패전 전 일본군의 대표적인 무모한 강제동원 사례로 꼽히는 마쓰시로 대본영 시설 안내도 맡고 있다.

조산 지하호 옆에는 일본 시민들이 세운 ‘또 하나의 역사관―마쓰시로’라는 전시관이 있다. 이곳에 전시된 물건을 보면 당시의 참혹했던 노동 환경을 엿볼 수 있다. 다이너마이트 폭발 뒤에 나온 돌 조각을 둘러메고 옮기던 지게가 대표적이다. 돌 무게까지 합치면 60~80㎏에 달했다. 조산 지하호에는 한자로 ‘대구’ ‘밀성’(밀양으로 추정)이라고 적힌 글자도 있다. 실제 적혀 있는 부분은 지금은 비공개 구간이다. 사진만 공개 구간 중간에 전시되어 있다.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그토록 애절하게 고향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일본은 패전을 앞둔 1944년 11월 도쿄에서 200여㎞ 떨어진 산악 지역 마쓰시로에 전시 최고통수기관인 대본영을 옮기기 위한 지하벙커 공사를 시작했다. 이른바 ‘본토 결전’에 대비하기 위해 도쿄 ‘궁성’(현재의 황거)에 있던 대본영을 지하호로 옮기는 계획이었다. 일본 굴지의 종합건설사인 니시마쓰구미(현재 니시마쓰건설)와 가지마구미(현재 가지마건설)가 공사 하청을 맡았다. 공사에 조선인 6천여명과 일본인 3천여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자료는 없다. 일본군이 패전 뒤에 자료를 대부분 폐기해버렸기 때문이다. 일반에 공개되는 구간은 조산 지하호 구간 중 일부(약 500m)다. 지금은 한 해 5만명이 찾아오는 관광 명소가 됐다. 지하호 공사는 75% 정도까지 진척됐으나, 8월15일 항복과 함께 중지됐다.

한국에서 피해 접수는 미미했다. 공사 시작 당시에 일본군 작업책임자도 무슨 공사인지 몰랐을 정도여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피해 사실을 정확히 신고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펴낸 자료를 보면, 2011년 시점에 파악된 피해자는 고작 18명이다.

공사는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린 뒤 쇄암기로 바위를 깨고, 터널 공사 등에 쓰이는 ‘광차’로 나르는 식으로 진행됐다. 터뜨릴 때 반대편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노동자가 돌에 맞아 숨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다이너마이트 기술자로 일했고 1991년까지 마쓰시로에 살며 당시의 참상을 증언했던 최소암(작고)씨는 “갱내에서 발파가 잘못돼 동료 4명의 몸이 날아갔다. 사람 목이 천장 판자 사이에 끼여 있는 것도 봤다”고 말했다. 그는 “희생자가 많은 날은 하루에 5~6명씩 죽었다”는 증언도 남겼다.

사망자 수는 추정일 뿐이다. 조선인 희생자는 220명에서 많게는 650명 이상으로 편차가 크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인 사망자가 백골이나마 고향에 돌아간 경우도 흔치 않다. 조산 지하호 근처에 있는 절 에묘지(혜명사)에는 나카노 지로로 ‘창씨개명’된 어느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비석이 서 있다. 이 절 주지 나카니시 지쿄는 “한국 이름은 알지 못한다. 니시마쓰건설회사 직원이 유골을 가져와 맡겼다고 한다”고 말했다. 유골은 2005년 충청남도 ‘망향의 동산’으로 이장됐다. 인적 사항이 일부나마 확인된 조선인 사망자는 4명뿐이다. 나머지 희생자들의 유골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조선인 사망자 주검을 수레로 나르는 것을 봤다는 증언 등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하라가 조산 지하호에서 손끝으로 한 점 빛나는 부분을 가리켰다. 빛이 보이는 지상에는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을 수용했던 ‘함바’(건설노동자들이 머물던 간이 숙소)가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함바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줄지어 이동해 12시간씩 지하호에서 노동했을 장면이 떠올랐다. 이날 조산 지하호를 둘러본 히라마쓰 가즈코(68)는 “자신들(전쟁 지도부)을 지키기 위한 공사였을 뿐이다. 이런 공사에 조선인들이 고생했다니 죄송한 생각이 든다. 전쟁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마쓰시로 대본영의 슬픈 역사는 이 지역의 평범한 일본 시민들이 지켜왔다. 1995년 일본 시민들은 조산 지하호 입구에 ‘조선인 희생자 추도 평화기념비’를 세우고 증언을 수집해왔다. 그러나 ‘역사 수정주의’는 이곳도 피하지 못했다. 나가노시는 2014년에, “주민과 조선인들이 강제적으로 동원되어”라고 돼 있던 대본영 지하호 안내문구 중 “강제적으로”라는 글귀를 테이프를 붙여 가렸다.

한겨레

시민단체들이 비판하자 그 뒤에 나가노시는 새 안내문을 붙였다. “반드시 모두가 강제적이지는 않았다는 등 여러 견해가 있다”는 표현으로 바꿨다. 조선인 강제동원이 형식적으로 ‘모집’, ‘관 알선’, ‘징용’으로 나뉘어 이루어졌고 마쓰시로 대본영에 여러 형태로 일본에 온 사람들이 혼재했다는 점을 이용해 강제노동을 부인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모집과 관 알선의 경우에도 실제로는 납치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연행해 간 경우가 많았다. 동원한 뒤에는 도주하지 못하도록 일본 관헌과 회사가 지속 감시했으며, 임금의 상당액도 저축 명목으로 주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마쓰시로 대본영 공사에 강제동원된 것으로 보이는 조선인과 가족 2600여명의 이름이 적힌 명부가 발견됐다. 하라는 “명부는 ‘또 하나의 역사관―마쓰시로’와 일본 국회도서관 등에 신청하면 열람할 수 있다”며 “최근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강제노동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들에게는 국가의 폭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고 말했다.

나가노/글·사진 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

[▶동영상 뉴스 ‘영상+’]
[▶한겨레 정기구독] [▶[생방송] 한겨레 라이브]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