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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토)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 옛 동독 '하일 히틀러' 다시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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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손진석 특파원




올해 스물아홉인 시모나 마렉은 2017년 독일 동부 브란덴부르크주에서 경찰관으로 채용됐다. 교육받고 있는 마렉은 내년에 교통 경찰관으로 정식 임용될 예정이다. 독일 경찰관이 되지만 그녀는 독일인이 아니다. 폴란드 남부 도시 자브제 출신인 폴란드 국적자다. 브란덴부르크주에서는 지역 내 젊은 인력이 부족해 2016년부터 경찰관 채용 시 이웃 나라 폴란드 젊은이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마렉은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브란덴부르크 젊은이들이 다른 지역으로 떠난 빈자리 덕분에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옛 동독 지역인 브란덴부르크는 독일 내 16개 주 가운데 두드러지게 빈곤한 지역으로 꼽힌다. 올해 2월 기준으로 브란덴부르크 실업률은 6.5%로서 독일 평균 실업률(3.1%)의 2배가 넘었다. 이 지역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독일 평균치(2018년 4만8670달러)의 73%에 그친다. 독일 땅은 분명하지만 경제적 형편은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이탈리아와 비슷하다는 얘기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브란덴부르크 젊은이들은 옛 서독 지역으로 앞다퉈 떠났고, 경찰관마저 외국인을 뽑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비단 브란덴부르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후 30년이 지났지만 독일은 여전히 동서(東西) 간 경제적 격차가 여전하다. 임금 수준, 고용 지표, 생산성 등 주요 경제 지표에서 옛 동독 지역이 옛 서독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패배감에 시달리는 동독 주민들은 극우정당 지지로 쏠리고 있다.

동독 인구 114년 전 수준으로 퇴보

올해 6월 독일 싱크탱크인 이포(Ifo)경제연구소는 베를린을 제외한 옛 동독 지역의 인구가 1360만명으로 감소해 1905년 수준으로 퇴보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무렵 1700만명이 살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30년간 순유출된 사람들이 340만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인구가 114년 전 수준으로 급감한 '동독 엑소더스'는 젊은 층에 집중돼 있다. 오랜 공산주의 체제의 영향으로 여전히 낙후된 고향을 떠나 옛 서독이나 해외에서 일자리를 찾으려는 젊은이들의 행렬이 멈추지 않는다. 젊은 인재들이 한 번 떠나기 시작하자 투자 기피 지역이 되면서 점점 더 서독을 따라잡기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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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브란덴부르크 미헨도르프(Michendorf) 기차역 앞에 내걸린 극우 성향 ‘독일을위한대안당’(AfD)의 선거 포스터. 포스터엔 빌리 브란트 전(前) 독일 총리의 모토인 ‘보다 많은 민주주의에의 도전(mehr Demokratie wagen)’이란 문구가 쓰여 있다. 경제적으로 낙후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옛 동독 지역에선 AfD의 지지율이 집권 여당인 기독민주당을 앞서는 상황이다. /연합 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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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다른 싱크탱크인 할레경제연구소(IWH)는 올해 3월 매출 규모로 독일 500대 기업의 본사 위치를 전수(全數) 조사했다. 그랬더니 전체의 93%인 464개 기업이 서독에 있고, 불과 36개 기업만 동독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상위 30대 기업은 동독 쪽에 단 한 곳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서 간 경제 활동이 균형을 찾지 못하고 서독에 힘이 쏠려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IWH는 서쪽에는 큰 회사가 많고, 동쪽에는 영세한 기업이 많다는 특징이 뚜렷하다고 했다. 전체 기업 대비 250인 이상 기업의 비중이 서독에서는 22.9%였지만, 동독에선 7.6%에 그쳤다.

동독에 대한 연방정부 투자 중단 요구 터져나와

1990년 통일 이후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를 누르고 유럽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구동독 지역은 독일 안의 '낙후된 외딴섬'으로 머물고 있다. 올 들어 독일의 실업률은 3.1~3.2% 수준으로 떨어져 사실상 완전 고용 상태가 됐다. 하지만 동독 지역 실업률은 7% 안팎에 달하는 것으로 연구기관들이 추정하고 있다. IWH는 동독의 소득 수준이 서독의 80%라고 분석한다. 그중에서도 폴란드 국경에 접한 남동부 도시 괴를리츠는 서독 대비 소득 수준이 68%로 가장 빈곤한 지역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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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줄면서 동독에서는 교통 노선, 의료기관, 학교 등이 줄줄이 감소하고 있고, 이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살기 척박한 기피 지역이 되고 있다. 일간 더타임스는 옛 동독 지역 고령자들은 몸이 아파도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치료해줄 의사도 부족하고, 병원을 찾아가기 위한 대중교통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30년이 지나도 동서 격차가 좁혀지지 않자 이제는 동독에 투자하는 것을 포기하자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독일 정부는 1990년 통일 이후 지금까지 2조유로(약 2710조원)를 균형 발전을 위해 동독 지역에 쏟아부었다. 여기에 투입된 돈은 독일 내 모든 납세자 소득의 5.5%를 걷는 '연대세(稅)'에서 나온 것이다.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아무리 많은 돈을 투입해도 옛 동독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연대세를 폐지하고 보다 생산적인 분야에 쓰자는 의견이 적지 않다"고 보도했다.

반난민·친나치 내세우는 극우 정당 득세

상대적 박탈감에 찌든 옛 동독인들은 극우정당을 지지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 다. 젊은이들이 떠난 빈자리를 채운 이민자들에게 반감이 크기 때문이다. 툭하면 극우 세력의 반(反)난민 시위나 '친(親)나치' 시위가 벌어진다. 지난해 9월 작센주 켐니츠시에서 이민자 추방을 주장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린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하일 히틀러'라는 나치식 경례가 등장한 것은 물론이고 '히틀러 사랑해요' 같은 구호를 새긴 기념품 판매가 이뤄졌다. 히틀러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켐니츠시는 동독 시절 사회주의 계획도시로 선정돼 한때 '카를마르크스시'로 개명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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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독 이후 경제적으로 낙후한 옛 동독 지역에선 상대적 박탈감이 심해지며 극우 정당을 지지하는 ‘친(親)나치’ 시위까지 벌어진다. 시위에선 나치식 경례〈사진〉까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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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일간 빌트암존탁이 실시한 정당별 지지도 조사에 따르면, 옛 동독 지역에서는 23%의 지지율을 얻은 극우 성향의 독일을위한대안당(AfD)이 지지율 22%인 집권 여당 기독민주당을 누르고 가장 인기 있는 정당이었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동독 지역이 외국인에게 배타적으로 대하면서 고급 인력 유치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고, 이에 따라 투자 부진이 가속화되면서 더욱 가난해지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파리=손진석 특파원(aur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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