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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충무로에서] 日의 철수와 韓의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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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업 철수까지는 불과 6개월이 안 걸렸다. 롯데그룹이 2017년 2월 성주골프장을 주한미군 사드 배치 용지로 제공하기로 한 후 그해 7월 롯데는 중국에서 마트사업을 철수해야 했다. 그동안 화재 점검, 납품 규제 등 중국 정부의 보복은 말도 못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현재 롯데는 중국에서 마트 112개를 모두 매각·폐점하고, 백화점 5개점 중 3개점을 매각한 상태다. 이제는 식품사업마저 정리 중이다.

그동안 우리 정부의 대응은 외곽을 겉돌았다. 처음엔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고 밝혔지만 정권이 교체되고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 대신 기업들이 스스로 중국에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가 우리 정부 관계자 입에서 나왔다. 반면 중국은 한류를 규제하는 한한령이나 한국산 제품 통관 차별, 전세기·비자 규제 같은 이른바 준법 보복을 일삼았다. 중국 내부에서조차 한국 때리기는 중국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자성론이 나왔지만 크게 들리진 않았다.

이번엔 일본이다. 사건의 원인은 다르지만 무역분쟁이라는 본질적 측면과 그 전개 방향은 중국 사드 사태와 닮은 점이 많다.

이달 초 일본 정부가 한국을 수출심사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반도체 소재 3종에 대한 수출 규제에 이어진 조치였다. 우리 정부는 이번에도 WTO 제소 카드를 뽑아 들었다. 동시에 기업들에는 수입처를 다변화하고, 자체 기술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번 기회에 일본산 대신 국내산 중소기업 제품을 써야 한다는 장관도 나왔다. 일본에서도 한국에 수출을 규제하면 일본 기업에 도움이 안 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역시나 희미하다.

자산이 압류돼 있는 일본 기업들은 이미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한국 기업이 떠나는 것조차 시간문제다. 일부 기업은 국내 생산 물량을 줄이고 미국·유럽 등 해외 공장 생산을 늘리는 방향을 검토 중이다. 사실 부품 소재 다변화는 중장기 과제다. 당장의 해법은 못 된다는 걸 정부나 기업 모두 잘 알고 있다. 소재를 한국산으로 교체하기 위해 실험 중이라는 말이라도 새 나갔다간 기존 공급망에서 타격을 입을까봐 내색조차 못하는 게 기업의 현실이다. 차라리 해외 공장에서 생산을 늘리는 게 빠르다. 이미 올해 1분기 제조업 해외 직접투자 금액이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국내 기업들의 '탈한국' 러시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 일본이 불을 붙인 것이다.

중국의 사드 보복은 롯데를 중국에서 철수시켰지만, 일본의 수출 보복은 수많은 일본 기업을 한국에서 철수시킴과 동시에 일본에 의존하는 한국 기업들을 한국에서 탈출시킬 수도 있다. 무역분쟁이 비이성적으로 치달을 경우 출구는 두 가지뿐이다. 사업 포기냐 국적 포기냐. 양국 기업도 결국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정부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달렸다. 이들을 붙잡을 수 있는 골든타임은 지금뿐이다.

[산업부 = 한예경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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